내가 죽인 소녀 - 하라 료(비채) ●●●●●●◐○○○
나 때문에 죽는 것은 한 명으로도 이미 너무 많다.
그로부터 약 10분 간 방 안에서는 범인들 사이가 틀어졌다는 가정을 두고 논의가 이어졌다. 그 가정을 부정할 수 있을만한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약속한 대로 의뢰인의 이름과 세 아들에 대한 조사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내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상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내 가정에 따르면 내가 아쿠쓰 일당과 뒤에서 습격한 남자의 방해를 물리치고 다음 레스토랑으로 가서 낮은 목소리의 여자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면 열한 살짜리 소녀는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 p. 290.
. 1년 반만에 만난 하라 료는 여전했다. 너무 딱딱하지 않을까, 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라는 우려와 타협하지 않고, 나는 원래 이런 글을 써. 이전 글을 읽었다면 이미 당신은 그걸 알고 있을테고, 그럼에도 다시 왔다면 뭔가 그걸 참아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거겠지. 난 그 가치를 다시 한 번 제공하겠어. 그러니 당신도 참으라고 말하는 듯 여느 때의 불친절한 글을 풀어놓는다.
.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소녀의 유괴 사건. 유괴범은 가족들에게 와타나베 탐정 사무소의 남자에게 6천만엔이 든 돈가방을 운반시키라는 알 수 없는 요구를 하고, 사와자키는 범인으로 의심을 받으면서도 소녀를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돈가방을 들고 필사적으로 도쿄 이곳저곳을 헤맨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들에게 습격을 당해 돈가방을 빼앗긴 채 정신을 잃고, 소녀는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들은 사와자키를 범인과 한패로 몰아붙이며 사정없이 심문하다 혐의가 거둬지자 사건을 망친 무능한 탐정 나부랭이는 사건에서 손을 떼라면서 내쫓는다. 하지만 경찰은 물론, 범인조차도 간과한 것이 있었다.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열한 살 소녀의 모습을 보고 사와자키가 스스로에게 깊디 깊고, 도저히 지울 수도 떼어낼 수도 없는 책임을 지웠다는 것. 이제 의뢰가 있건 없건, 방해가 있건 없건 간에, 누구도 그 어떤 것도 사와자키를 멈출 수는 없다.
"난 거금 운반을 의뢰받았는데 그 돈을 빼앗겼어. 돈을 빼앗은 인간 - 다만 아쿠쓰 같은 하수인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을 말하는데, 그놈을 경찰이 검거하지 않는 한 나는 그 놈을 계속 찾을거야. 막고 싶으면 정식으로 법적 절차를 밟아 날 구속하면 돼. 그럴 수 없다면 서로 협력하는 방법밖에 없겠지. 모처럼 이만한 머릿수가 모였는데 좀 더 시간 낭비가 없도록 이야기할 순 없겠나?"
- p. 275.
. 첫 머리에 하라 료는 여전했다고 말한 것처럼, 이 소설은 전작인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를 떠오르게 하고, 전작이 그랬던 것처럼 챈들러의 소설들을 떠오르게 한다. 읽는 내내 몇 번이나 고유명사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확인해봐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대체 이 인물이 왜 여기에 나오는건지 좀처럼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와자키는 - 하라 료는 - 독자를 위해 부연하기보다는 그냥 움직이는 쪽을 택한다. 필립 말로가 '기나긴 이별'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대체 왜 나오는지도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결국은 다시 처음의 지점으로 돌아와 어영부영 사건을 해결해버리고 다시 사무실에 홀로 덩그러니 남은 것처럼, 하라 료 역시도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뜬금없이 추격전을 벌이다 모두가 실패했구나 생각하는 그 때, 처음으로 돌아가 사건을 해결해버린다. 그리고는 그 어떤 사례도 받지 않고 어떤 이득도 거부한 채 텅 빈 사무실로 돌아간다. 사라져버린 옛 동료의 편지를 읽고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보내는 라스트는 덤.
. 이야기 그 어디에도 내가 끼어들어 사와자키와 머리 싸움을 벌일 여지가 없다. 그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종잇장을 꾹 잡고 버틸 뿐이다.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진지해지기만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고 화이트든 블랙이든 유머를 섞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시대에, 우직하게 80년 전 처음 모습 그대로의 하드보일드를 고수하는 하라 료를 - 그리고 그 덕에 시대착오적이거나 말거나 누구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고스란히 책임을 떠안고 이야기의 끝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사와자키를 보기 위해.
p.s. 그래서 책 뒤에 맺음말 겸 부록으로 실린 '한 남자의 신원조사'는 귀여웠다. 그래도 당신도 자기 변명도 하고, 두 손 모아서 세상에 대고 나도 나름 잘났다고 외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구만. 다행이네. :)
네 명의 참석자가 제단 앞에 놓인 관 앞으로 나아가 영정을 향해 조사를 읽었다. 맨 첫 번째는 재단법인 '청소년음악진흥회'의 전무이사라는 사람의 형식적인 조사였다. 고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데에 내기를 걸어도 좋을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지휘자로 고인의 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자신의 식견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는 조사였다. 세 번째는 고인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PTA 회장으로 메지로, 이케부쿠로, 도시마 등의 지명이 자주 언급되는 지역 발전형 조사였다. 마지막은 같은 반 여학생의 작별인사였다. 고인은 어린애들 사이에서는 천재도 뭣도 아닌 평범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느껴지는, 마음을 편하게 하는 조사였다.
- p. 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