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물로서의 단점을 압도하는 이미지의 힘

여왕벌 - 요코미조 세이시(시공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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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드시 당신을 따라다니는 흉성을 이겨 보이겠어."



아, 도모코, 어쩌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는 걸까! 타오르는 듯 붉은 애프터눈 드레스, 황금 목걸이에 황금 이어링, 팔에도 황금 팔찌를 차고 길게 그린 눈썹, 새빨갛게 칠한 입술. 그것은 마치 여름 햇빛 아래 흐드러지게 핀 진홍색 달리아처럼 강렬한 아름다움이었다. 게다가 변한 것은 복장이나 화장의 취향만은 아니었다. 코스케의 얼굴을 보고 생긋 웃는 추파에도 요부의 교태가 넘쳐흘렀다.

- p. 256.




. 일단 이 소설에서 범인을 추리하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못박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애초에 등장하는 인물이 얼마 안되는데다 긴다이치 시리즈가 그렇듯 여느 때처럼 연쇄살인이 일어나는데, 이 과정에 용의자 후보들이 모조리(....) 살해당하기 때문에. 여기에 곁들여지는 로맨스까지 감안해서 스토리 전개 상으로, 물리적으로 살인이 불가능한 사람을 제외하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범인 하나뿐이라는 살짝 당황스러운 결과가 나온다. 그렇다보니 이렇게 진상이 뻔할리가 없는데 하며 되도 않은 공범을 끌어대다 자멸해버리는 독자가 있을 수 있다고, 그리고 이런 예상이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 그렇다보니 '누가'를 추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와 '왜' - 즉 트릭과 동기를 추리하는 것으로 방향을 돌려야 할텐데, 이 소설의 트릭은 그동안 '옥문도'나 '이누가미 일족', 혹은 '혼징 살인사건'에서 요코미조 세이시가 자랑하던 빈틈없이 짜여진 트릭과는 달리 영 엉성하다. 소설 첫머리에 등장하는 월금이 19년 전의 살인사건에서 등장해야 할 이유도 마땅치 않고, 작중의 유사 살인사건에서 시계에 대한 추리도 영 납득이 가지 않는다 - 그 시계는 긴다이치가 처음 추리했던 것처럼 범행시간이나, 최소한 범인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던 시간을 한정짓는 장치로 기능했던 게 맞는데 왜 굳이 그게 잘못이라고 의견을 바꿨는지 알 수가 없다 - 더군다나 미야케 살인사건에 이르러서는, 대체 사랑에 푹 빠져버린 남자가 여자로부터 '하나하나' '손바닥에 직접 받은' 초콜릿 포장의 '색깔'을 착각하고 다른 초콜릿을 먹는 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





이 정도로 근사한 육체를 본 적은 없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조각처럼 균형이 갖춰져 있었다. 넓은 어깨, 두터운 가슴, 근육이 울퉁불퉁 솟은 늠름한 팔, 단단하게 조여진 허리, 둔부에서 허벅지에 걸쳐 남성미와 젊음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피부 또한 좋았다. 욕탕에 들어갔다 나와서인지 희미하게 상기된 다갈색 피부는 머릿기름을 바른 것처럼 반들반들 정기로 넘쳐흐르고 있다.

- p. 71.





. 하지만 이런 추리물로서의 빈틈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의 압도적인 장점은 매력적인 이야기 - 이미지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접근하는 남자들을 차례차례 죽음에 이르게 할 운명'의 여왕벌로 긴다이치 시리즈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캐릭터인 도모코와, 그리스 조각 같은 외모와 육체에 남성미가 넘쳐 흐르는 다몬 렌타로, 도모코를 둘러싼 세 경쟁자와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마구 뿜어내는 수행자, 어딘지 모를 쓸쓸한 분위기가 흐르는 단정한 외모의 가정교사와 장신의 호남자이자 재벌가의 회장인 양아버지, 여기에 무려 명문 황족까지 등장하는 등 낯뜨거울 정도로 뚜렷하고 강한 캐릭터를 가진 이들이 나오고, 이들을 둘러싼 월금 모양의 섬이나 15분마다 울리는 거대한 시계, 화려한 무도회와 공연, 빼어난 외모를 가진 남녀의 로맨스까지 매력적인 이미지를 최대한으로 부각시킨 장치들이 여기저기 자리하고 있다.


. 그래서 여왕벌은 그 인지도에 비해 유독 영화화나 드라마화가 많이 된 작품인데, 실제 소설을 읽으면서도 이런 작품이 제대로 영상화가 된다면 책보다 훨씬 낫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이야기의 동기 같은 경우에도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별다른 장치없이 등장인물들의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잘 드러났을테고, 인물들의 연애감정이나 과거의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들도 책에선 분량 문제 때문인지 약간 급하게 진행된 감이 있지만 영상속에선 더 설득력있게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책에서 여왕벌로 묘사된 도모코를 맡을 만한 매력있는 배우를 꼭 보고 싶기에. :) 이렇게 책 속의 장면들을 실제로 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 거장이 써내려간 이미지의 힘일 것이다.



p.s. 가장 최근에는 2006년에 쿠리야마 치아키가 도모코 역을 맡았다는데, 강한 인상과 서구적인 얼굴 때문인지 미스테리 물에서 '비밀을 감춘 매력적인 미인'을 많이 연기했던 배우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역시 '배틀로얄'의 나이프녀나, '킬 빌'의 고고 유바리 역으로 익숙한 배우일텐데, 사실 도모코 역을 맡을 정도인가 하면 그건 또 좀. 사진 상의 외모로만 보면 1978년의 카타히라 나기사가 가장 어울려보이는데, 거의 50년 전의 영상이라 구할 방법이 없는 게 아쉽다. :)



"그래요. 당신에게는 흉성이 따라다닐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별의 요기를 받아 불행해진다는 것은 그놈의 별들이 당신의 별보다 약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나는 달라." 렌타로는 말에 힘을 주었다. "나는 강해. 내 별은 강합니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따라 다니는 흉성을 이겨 보이겠어. 도모코 씨, 저를 신뢰해주십시오."

- p. 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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