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사 1권 - 도널드 서순(뿌리와이파리) ●●●●●●●●○○
1800년에는 제 아무리 귀족이라도 2000년의 평범한 상점 점원보다
문화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이렇게 문화적 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는 상황, 아주 많은 이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황에 이르는 데에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0년 전인 1800년에 클래펌 역의 지하철 승객에 해당하는 이들 대부분이 읽거나 쓸 수 없었다. 학교교육은 의무가 아니었다. 대학에는 극소수 엘리트만 다녔다. 유급휴가는 없었다. 사람들은 퇴직을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젊어서 죽었다. 사람들 대부분은 책 살 돈이 없었고, 심지어는 도서대여점에서 빌릴 수도 없었다. 들판이나 공장으로 일을 하러 가는 이들은 거의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 음악이라고 해봐야, 일요일에 동네교회에서, 또는 1년에 몇 번 열리는 축제나 장에서 경험하는 것뿐이었다. 간혹 민요가 있고, 또 간혹 싸구려 소설이나 발라드가 있었지만, 독서의 즐거움은 대체로 중간계급 -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하인들 - 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 중간계급은 그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였던 대영제국에서도 좁은 층이었다. 물론 특권은 귀족이 더 많이 누렸다. 그러나 1800년에는 제 아무리 귀족이라도 2000년의 평범한 상점 점원보다 문화적으로 궁핍한 상태였다.
- p. 14. 머리말
. 푹스의 '풍속의 역사'에 이어 두 번째 생활사 시리즈인 도널드 서순의 '유럽문화사'를 읽기 시작한다. 풍속의 역사가 중세에서부터 19세기 중후반부까지의 역사를 20세기 초반의 시각으로 바라봤던 것에 비해, 유럽문화사는 1800년부터 2000년까지의 200년을 최근의 시각에서 다룬다. 그렇다보니 '로빈슨 크루소'를 언급하면서 '캐스트 어웨이'를 언급하거나 세르반테스를 이야기하면서 '로스트 인 라만차'를 언급하는 식으로 요즘(?)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하고.
. 이 책이 참 이채로우면서도 '똑똑하다' 싶었던 건, 5권으로 된 시리즈의 첫머리를 소설과 책의 역사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책을 일부러 찾아 읽을 사람이라면 당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일테고, 그런 이들에게 책과 소설의 역사만큼 어필할 수 있는 소재는 없을테니까. 거기다 이 책은 괴테, 세르반테스, 월터 스콧 같은 이름만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대문호에서부터 로렌스 스턴, 새뮤얼 리처드슨처럼 문학전집의 책등을 통해 이름만 슬쩍 본 작가들에다가 피고 르브룅이나 폴 드 코크처럼 생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작가들까지 고루고루 등장시킨다. 한때 정말 할 일 없던 시절(^^;)에 인터넷 백과사전에 나오는 '작가' 카테고리를 뒤져 이름과 주요 작품을 ㄱ부터 ㅎ까지 죽 읽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라는 건 당시의 자료를 파고 또 파들어간 저자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스스로 책에 대해 '나도 나름 좀 읽었는데'라고 생각하는 독자라면, 끊임없이 나오는 이 책의 작품과 작가들을 얼마나 아는지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금세 겸허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
서적행상은 부유층에서 시장을 발견했다. 그들이 파는 책은 간단하고 대개는 소박한 것들이었지만, 그 점이 중간계급과 상층계급 독자들이 그 책을 즐기는 데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오늘날의 비즈니스석 승객들이 공항소설과 대중영화를 왕성하게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17세기 독자들은 뒷날의 '리더스 다이제스트' 독자들처럼 악한소설 축약본을 좋아했다. 1554년에 스페인에서 출간되자마자 프랑스어로 번역된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가 그 예다. 영국에서 많이 팔린 '로빈슨 크루소'는 과감하게 단 여덟 쪽으로 줄인 축약본이었다. '항해와 여행 : 요크 출신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삶과 모험'이라는 긴 제목이 붙은 이 책은 원작에서 중요한 '행동'이 막 시작되려 하는 난파 대목에서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알렉상드르 뒤마, 폴 드 콕, 외젠 쉬, 소피 코탱, 장 자크 루소 같은 작가들의 더 길고 짜임새 있는 장편소설을 번안하거나 요약한 챕북들이 나왔다.
- p. 132. 행상문학
. 저자가 1권 내내 언급하는 것처럼, 19세기 초에 책은 그나마 많은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문화 컨텐츠였다. 미술이나 음악, 연극이 접할 수 있는 장소가 한정된 데에 비해 책은 어쨌든 집에 꼽아져만 있으면 남녀 누구든 즐길 수 있었고, 많은 귀족 집안에서는 하인들에게까지 장서를 개방하기도 했다. 그렇게 독서인구가 증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이들은 인쇄와 출판과 책 대여업(!)에 대거 뛰어들었고, 그 결과 19세기 초반은 소설의 열풍이 불어닥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게 도널드 서순은 책의 절반이 훨씬 넘는 350쪽을 할애해 당시 유럽에 널리 퍼졌던 독서 문화와 그 과정에서 소개되고 잊혀진 책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서 이 책은 '유럽문화사'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유럽소설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책 리뷰집(^^;)으로서도 유효하다. 그리고 셋 중 어느 쪽으로 읽어도 꽤나 즐겁다. :)
반복과 혁신, 복제와 번안이 이 게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리아스'의 전제, 곧 왕비가 남자와 눈이 맞아 달아나고 그녀를 구출하기 위한 원정대가 출발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데서는 찾아볼 수 있다. 오랜 전쟁이 끝난 뒤에 병사가 귀향했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유럽인이 신데렐라, 생드리용, 세네렌톨라, 아셴푸텔 따위로 부르는 이야기는 어떤 한 지역에서 나온 것일수도 있다. 아니면, 더 가능성이 크게는, 여러 지역에서 나왔지만 플롯의 기본요소들이 꾸며지고 다른 요소들과 얽힌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서사 장르들의 경계는 단번에 확립되지 않고 늘 유연한 것이다. 나아가 성공한 장르와 텍스트는, 모방되고 번안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현지화된 지방적 특질을 버리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요소들을 획득한다.
- p. 24. 머릿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