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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돈을 추구하지만 결과는 우연에 의한 것이길 바란다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 데이비드 실베스터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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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나의 작업 방식이 전적으로 우연적인데다 더욱 더 우연적으로 진행되어, 말하자면 우연적이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우연을 되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리는 수수께끼 안에서 외관의 수수께끼를 알아챌 수 있도록 외관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창작의 비논리적 방식입니다. 즉 바라는 바를 시도하는 비논리적인 방법이 논리적인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전적으로 비논리적인 방식을 통해 작품에 홀연히 외관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그 외관은 완벽하게 사실적인 이미지, 즉 초상화의 경우에는 대상 인물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될 것입니다.

- p. 255. 이미지의 변형.





.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화가가 있나보다 - 라고 하는 건, 그동안 이런저런 책을 읽었음에도 현대미술에 대해선 정말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 그동안 뉴스에 '비싼 작품'으로 종종 소개되었던 뒤샹, 워홀의 이름 정도야 들어봤지만, 예술에 대한 내 지식은 사실상 19세기를 끝으로 멈추어 있다. 그러니 프랜시스 베이컨하면 같은 이름의 중세 사상가가 더 유명할 밖에(하지만 사상가 베이컨이 무슨 얘기를 모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 그런 베이컨에 대해서 데이비드 실베스터라는 영국의 미술평론가가 25년에 걸쳐 인터뷰를 했고, 그걸 한 권으로 모아서 출간한 것이 이 책이다. 물론 25년이라는 기간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던 건 책의 인터뷰가 상당히 적극적이며, 두어 챕터에서는 적극을 넘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우연과 의도, 추상과 구상, 정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은 정돈을 추구하지만 그 결과는 우연에 의한 것이길 바란다'는 베이컨의 창작 방법을 납득이 갈 때까지 캐묻고, 추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베이컨을 상대로 논쟁을 벌이며(!) 그의 정치관을 공격하기도 한다. 참고로 베이컨은 사회보장을 내키지 않아하고 경쟁을 옹호하는 우파적 정치관을 가졌는데, 하긴 현대미술을 하는 동성연애자가 좌파여야만 한다는 법은 없겠지만, 좀 혼란스러운 건 사실이다. :)





베이컨) 오히려 관람객이 추상화에 보다 깊숙이 빠져들 수 있다고 봅니다. 누구든지 소위 통제받지 않은 감정에 보다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어쨌든 불행한 연애나 질병을 구경꾼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는 이와 같은 것들에 빠져들어 자신이 거기에 참여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술이 다루는 바와 관계가 없습니다. 당신이 말한 것은 관람객이 공연에 참여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추상미술에 한층 더 깊숙이 빠져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제공되는 것은 싸울 필요가 없는 보다 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베스터) 만약 추상화가 패턴 제작에 지나지 않는다면, 때로 추상화에 대해서 구상화의 경우와 동일하게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는 나같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베이컨) 그것은 유행입니다.

- p. 179. 생각의 도화선.





. 하루키가 그의 에세이에서(아마 무라카미 아사히도였을 것이다) 일본의 대담에 대해 '상대방이 뭔 소리를 하는지 잘 이해가 안가더라도 "그런 점도 이해할 수 있겠군요" 하면서 어물쩡거리며 결론 비슷한 것을 내는 데 능하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정반대로 이 책의 대담은 타협도 결론도 분량조절도 없이 치열하게 된다. 설마 그래서 25년이(....) 걸린 건 아니었겠지만. :)


. 그래서 이 책은 현대미술을 잘 모르더라도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다. 일단 오가는 대화에 긴장감이 느껴지는데다, 한쪽의 일방적인 설명이나 강의가 아니라 실베스터의 집요한 질문과 베이컨의 필사적인 방어를 따라가다보면 읽어내기 어렵다는 이유로 폄하되기 일쑤인 현대미술과 미술가들의 고뇌, 그 결과물에 대해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에. 특히 '훌륭한 연기자'와, '생각의 도화선' 편은 강력 추천.





베이컨) 당신은 모를 겁니다. 작업 중에 경험하는 절망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물감을 집어들고 삽화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시도하게 만드는지를요. 이미지의 의도적인 표현을 깨뜨리기 위해 나는 헝겊으로 작품 곳곳을 닦아내거나 붓을 사용하거나 뭐든 손에 들고 문질러대거나 테레빈유나 물감을 작품에 던집니다. 그러면 이미지는 자발적으로 나의 구조가 아닌 자체적인 구조 안에서 발전하게 됩니다. 그 뒤에 내가 원하는 바에 대한 감각이 작동하기 시작하고 캔버스에 남겨진 우연에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 모든 것들로부터 의도적인 이미지의 경우보다 한층 더 유기적인 이미지가 나타납니다.

- p. 79. 훌륭한 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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