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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읽는 한 시대의 이야기

중세의 사람들 - 아일린 파워(이산) ●●●●●●○○○○

by 눈시울


"성무일도를 위해 일어날 때,
잠이 덜 깬 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댈 터이므로 서로 따뜻하게 격려할 것."




그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장터를 돌아다니면서 작은 좌판에 펼쳐져 있는 온갖 진기한 물건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생드니에 모여든 상인들은 멀리 동양에서 수입된 고가의 물건들을 보도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 팔았다. 부유한 프랑크인 귀족들은 그곳에서 오렌지색 장식이 달린 자줏빛 비단예복, 근사한 가족상의, 공작 깃털, 플라밍고의 주홍색 깃털('불사조의 껍질'이라고 불렸다), 향수와 진주와 향신료, 아몬드와 건포도, 부인에게 선물할 애완용 원숭이 따위를 구입했다. (중략) 상인들은 그런 사치품을, 당시에 대단히 높이 평가되던 프리슬란트의 직물, 곡물과 사냥개, 수도원의 공방에서 제작된 금세공품과 교환했다. 보도는 아마도 백여 가지 방언과 언어를 들었을 것이다. 작센과 프리슬란트, 스페인과 프로방스, 루앙과 롬바르디아에서 온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잉글랜드인 한두 명까지 끼어들어 좁은 장터에서 북적댔기 때문이다.

- p. 44. 농부 보도.





. 책은 250페이지 정도 되는 짧은 분량 속에서 여섯 명의 인물을 통해 각각의 처지에서 중세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르코 폴로도 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신분은 각각 다를지언정 '저명한'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들이 남긴 단편적인 서신과 지침, 주문서와 유언장 등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또 이를 기반으로 중세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파악하고 있다.


. 그 안에서도 모든 시절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의외로 중세 일반인들의 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빈곤하거나 비참하지는 않았다. 특히 가공할만한 흑사병이 온 땅을 휩쓸고 지나간 후 남은 사람들의 생활은 이전이나 그 후에 비해 훨씬 나았는데, 임금은 상승했고, 부족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되어 생산량은 증가하였으며, 아직 본격적인 소빙기가 오기 전의 간빙기였기에 온화하고 농사에 알맞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중세하면 흔히 가혹한 봉건제도와 자신의 땅을 가지지 못한 소작농의 신세, 엄격한 기독교의 지배, 도둑과 거지 등이 난무하는 비참한 암흑기를 떠올리게 되지만, 실제로는 봉건제도가 긴 시간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며 소작농들은 체제 안에서 안전과 평안을 보장받고 있었으며, 교회 역시도 과거의 미신이나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과 유연하게 융합하고 있었다는 것을 농부 보도나 수도원장 에글렌타인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엾은 토머스 벳슨의 사무소에서 다음과 같은 각종 화폐가 쏟아져 나왔을 때, 그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지 한 번 상상해보라. 스코틀랜드의 앤드루 금화, 헬데를란트의 아르놀트 금화(품질이 대단히 조악함), 부르고뉴 공 샤를의 샤를 은화, 프랑스의 신구 금화, 위트레흐트 주교관구의 다비드 화폐와 팔레버 화폐, 베스트팔리아 백작령의 헤티누스 은화, 프랑스의 루이 금화, 림뷔르흐 은화, 밀라노 은화, 네이메헨 은화, 브라반트의 펠리페 금화, 위트레흐트의 플라크 화폐, 여러 주교가 발행한 포스틀레이트 화폐, 잉글랜드의 리알 화폐(10실링의 가치를 지님), 스코틀랜드의 기마화폐 또는 부르고뉴의 기마화폐(말 탄 사람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서 이렇게 불림), 쾰른 주교관구의 플로린 레나우 화폐, 세틸러 화폐 등등. 지정거래소 상인조합은 각 화폐의 가치를 잠정적으로 정해두었는데, 벳슨은 각종 화폐가 잉글랜드 화폐로 얼마에 해당하는지 숙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 대부분은 극히 품질이 나빴다.

- p. 209. 토머스 벳슨.





. 이와 함께 재닛 아부-루고드가 '유럽 패권 이전'에서 중세야말로 세계가 하나로 이어져서 대등하게 교류할 수 있었던 시대라고 강변했던 것처럼, 아일린 파워 역시 마르코 폴로와 이후 수도사, 상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당시 구대륙이 하나로 이어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육로로든 해로로든 날씨나 소규모의 도적떼(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상단이라면 얼마든지 대비할 수 있는)를 제외하면 무역로는 안전했으며, 원나라가 붕괴하기 전까지 유라시아 대륙 양 끝단의 교류는 계속되고 있었다. 또한 토마스 페이콕의 유언장과 토마스 벳슨의 서신을 통해 유럽 세계 안에서의 산업과 교역 역시 착실하게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이후 유럽 중심의 시대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주기도 한다.


. 하지만 이 책에는 이렇게 딱딱한 이야기만 실려있진 않다. 이 책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약간은 주책맞은 수녀원장의 일상에 대해 묘사한 마담 에글렌타인의 이야기나, 마흔 살 가까이 차이나는 아내를 맞아 남편이 아내에게 보내는 교훈서를 다룬 '메나지에의 아내' 같은 소소하고 유쾌한 이야기들이었다. 아일린 파워는 수녀들의 절대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수다와 마치 학생들이 교복을 줄이는 것처럼 엄격한 수녀원의 복장규칙을 교묘하게(때로는 대놓고) 피해가면서 귀엽게 자신을 꾸미는 모습, 예배시간에 애완동물을 데리고 들어와 무릎에 앉힌 채 예배를 보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마치 저자가 자신의 학교생활을 떠올려가며 쓴 것처럼 글이 확 밝아져 있어서 읽는 입장에선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메나지에의 아내 편에 나오는 교훈서 역시도 처음엔 그저 시끄러운 잔소리 같았지만 알고보면 무려 '늙은 자신이 아내보다 먼저 죽을 게 확실하므로, 그녀가 두 번째 남편에게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킬 만한 일을 하지 않도록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는 중세인 특유의 쿨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유쾌한 글이었고.


. 저자는 그렇게 여러 자료를 통해 중세에 대해 재평가하는 동시에 아직 그 당시만 해도 확실히 자리잡지 못했던 '사회사'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머리말에서 말하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생은 유명인사만큼 화려하지 않을 뿐이지 결코 재미없는 것은 아니며, 역사란 그것이 살아있을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다섯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그것도 무척 쉽고 재미있게. :)





수녀들은 끝기도를 마치고 나면 규정대로 침상으로 직행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음료수를 마시면서 수다를 떨었기 때문에, 새벽 한두 시에 눈을 뜨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아침기도 시간에는 졸기 일쑤였고, 늦잠꾸러기로 알려진 새뮤얼 존슨만큼이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괴로웠다. 현명한 성 베네딕트는 규율을 정할 때, 그런 어려움이 있을 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성무일도를 위해 일어날 때, 잠이 덜 깬 자는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댈 터이므로 서로 따뜻하게 격려할 것."

- p. 109. 마담 에글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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