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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추리를 모두 잡았지만, 그게 오히려 진입장벽일까

흑뢰성 - 요네자와 호노부(리드비) ●●●●●●●○○○

by 눈시울


"간베에, 자네의 지난 열 달은 전부 이를 위한 것이었나?"




"그 생각이 잘못된 게야. 오다는 이 전쟁에서 결전에 이르지 않은 시점에 이미 승리한 것이다. 오케하자마 전투 때처럼 막상 육상전이 붙으면 병사가 적은 쪽이 반드시 진다는 보장도 없고, 대군이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때문에 나는 오다가 결전을 피할 수 없는 때와 장소를 골라서 전쟁을 시작했다."

무라시게가 호쿠세쓰에서 모반하면 하리마의 하시바 지쿠젠노카미 히데요시가 고립된다. 오다 군은 히데요시를 버리거나 아리오카 성을 공격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를 버리면 서부 큐슈 지방 공격이 무효화되는 이상 오다는 싫어도 아리오카 성을 공격해야만 한다. 그 시기를 맞추어 결전을 벌인다.... 그것이 무라시게의 계획이었다. 전쟁은 무라시게의 생각대로 굴러갔다. 오다는 예상대로 대군을 끌고 아리오카 성을 포위했고, 본인도 직접 출진했다. 남은 것은 결전 뿐. 그래야 했다.

하지만 무라시게가 쌓아 올린 무대에 모리가 올라오지 않았다.

- p. 290. 원래염불





. 1578년 11월, 다케다 가쓰요리가 나가시노 대패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유일하게 오다 노부나가를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물이었던 우에스기 겐신마저 급사해 동쪽의 위험이 꺾인 시점. 아직 오사카의 혼간지가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혼간지의 배경이 되어주던 모리가 해전에서 오다에게 처참하게 패배하면서 이제 천하의 향방을 조심스럽게나마 가늠할 수 있었던 그 시점에서, 혼간지 포위망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던 오다 세력의 영주 아라키 무라시게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반란을 일으켰다.


. 오사카의 북서쪽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무라시게의 반란은 해전에서 완패한 모리가 혼슈 중부의 비젠과 하리마를 거처 오사카로 진입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걸 의미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란으로 오다 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하리마의 구로다 간베에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지만,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죽이지도 돌려보내지도 않은 채 지하 감옥에 감금한다. 적의 편에 넘어갔다는 오해를 사면 오다의 인질로 잡혀 있는 아들의 목숨이 위험해지게 되기에 간베에는 무라시게에게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하지만, 무라시게는 이를 외면한다....





"나는 이 근방에서 하급 가신들 중에 언제까지고 남 밑에서 일할 그릇이 아닌 자를 세 명 알고 있다. 하나는 비슈 우라가미 가문에 몸담은 우키타 이즈미노카미 나오이에, 또 한 명은 셋슈 이케다 가문에 몸담았던 이 몸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반슈 하리마 고데라 가문의 고데라 간베에.... 아니, 고데라의 이름은 잊겠다고 했지. 그렇다면 구로다인가, 구로다 간베에 요시타카. 바로 자네다."

무라시게는 나무 격자를 사이에 두고 웅크린 간베에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간베에, 지혜를 내놓아라."

- p. 111. 설야등롱





. 라는 정도의 배경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네 편의 중편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의 큰 팩션으로 구성된 이 소설은 이러한 배경지식이 있다면 추리와 역사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수작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솔직히 재미있게 즐기기는 쉽지 않다. 게임이나 드라마를 통해 일본 전국시대가 익숙한 독자가 아니라면 기껏해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도를 아는 게 고작일테고, 전국시대를 다룬 책들 중에서 그나마 국내에 알려진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舊 대망)'에도 이 사건은 등장하고 있지 않으니까. 같은 작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읽었거나, 아니면 오카다 준이치가 주연으로 열연했던 NHK 사극 '군사 간베에'를 봤던 정도는 되어야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 익숙할테고, 이 사건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것만으로 이야기의 내용을 오롯이 즐긴다는 건, 아무래도 좀 힘들지 않을까.





"무릇 영주가 되는 데에는 세 가지 명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이는 대대손손에 이르기까지 영주입니다. 이케다, 이타미 무리가 이쪽이지요."

간베에가 손톱에 흙이 잔뜩 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또 하나는 정당한 명령을 받아 임무로 다스리는 자 역시 영주입니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이의 다케다, 그런 자들의 근본이 이것입니다."

두 번째 손가락을 세웠다.

"또 하나, 미지의 힘으로 신비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자를 만인이 영주로 받드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혼간지 세력도 처음에는 그렇게 성립된 것으로 압니다."

간베에는 세 번째 손가락까지 세웠다가 세 손가락을 전부 굽혔다.

"이 세 가지 명분 중 단 하나도 없이 그저 전략으로 영토를 빼앗으려는 자는 잠시 동안은 위세가 좋겠지만 말로가 비참하지요. 과거에는 아사히 쇼군 기소 요시타카 공, 최근에는 사이토 도산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 p. 358. 원래염불





. 아무튼 그렇게 간베에는 지하 감옥에 갇히고, 무라시게는 노부나가를 상대로 공성을 시작한다. 몇 차례의 공격을 무난히 막아내지만 길이 열렸음에도 모리 군은 올 기미가 없고, 그 사이에 오히려 모리와 오사카를 잇는 통로인 비젠 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우키타 나오이에가 오다의 편에 선다. 우키타가 오다의 편에 선다는 건 이제 모리가 오사카로 오기 위해선 먼저 비젠을 함락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길이 열려 있을 때도 오지 않았던 모리가, 이제와서 우키타 나오이에를 상대로 이길 지 질 지 알 수 없는 전투를 감수하면서까지 올 가능성은 드물다.


. 그렇게 무라시게의 대전략이 무산된 상황에서 성 내부를 흔드는 사건들이 발생한다. 적에게 투항한 장수의 가족이 살해당하기도 하고, 죽었다는 적장의 수급을 놓고 공을 다투는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고, 화평을 위해 오다에게 보내려던 사자가 살해되기도 한다. 성내의 모두가 똘똘 뭉쳐도 강대한 오다 군을 막아낼 수 있을 지 없을 지 알 수 없는 판에 의문의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자 성내는 술렁거린다. 군과 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농성을 지속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사건의 진상을 사람들에게 명명백백히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무라시게는 사건이 터질 때마다 지하감옥에 가둬놓은 간베에를 찾아가고, 감옥 안의 간베에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렇게 간베에의 도움을 얻어 하나하나 사건을 해결해가며 민심을 다독이는 무라시게지만 정작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는다. 자신의 흉계에 빠져 아들을 잃고 지하감옥에 갇힌 간베에가 왜 자신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려주는 것일까. 살아남기 위해서일까? 지적인 호기심과 과시욕 때문일까? 그렇게 성내의 필사적인 농성이 한계에 이르렀을 때, 무라시게는 이 모든 것의 대답과 마주하게 된다.





무라시게에게 간베에는 그림자처럼 붙잡기 힘든 남자였다. 과거 고데라 가문의 일개 가신이었던 고데라 간베에는 재치를 자랑하고 무예를 중시하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무사일 뿐이었다. 이 감옥에 갇힌 간베에는 그 지략을 천하에 떨칠 기회를 기다리는, 까다롭지만 다루기 쉬운 남자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 달, 두 달 지나는 사이 무라시게는 간베에를 점점 알 수가 없었다. 영리한 남자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베에가 뭔가를 바란다는 건 알겠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호해서 짐작할 수 없었다.

- p. 343. 원래염불





. 하나하나의 사건들보다 무라시게의 반란이 왜 일어났는지, 무라시게는 왜 간베에를 살려뒀는지, 간베에가 왜 무라시게를 돕는지 같은 역사적인 미스테리가 훨씬 재미있었던 소설이다. 실제로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에서 벌어졌던 무라시게의 반란 자체가 미스테리한 사건이었기에 얼버무리지 않고 성실하게 하나하나 작가 스스로의 답을 내놓은 것만으로도 훌륭했지만.... 역시 이런 부분을 즐기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필수라, 진입장벽이 너무 높다는 점은 걸림돌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간베에, 자네의 지난 열 달은 전부 이를 위한 것이었나?"

- p. 490. 낙일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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