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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의미없는 진상, 가치없는 진실이라니

사볼타 사건의 진실 - 에두아르도 멘도사(민음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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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밀고자가 입안의 내용물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며 말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거야?"
"파하리토 데 소토요."
바스케스 반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관심 없어."




"사볼타 얘기도 아니면서 여긴 무슨 이유로 왔지?"

바스케스 반장이 물었다.

"나는 누가 그를 죽였는지 알고 있습니다."

밀고자가 입안의 내용물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며 말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거야?"

"파하리토 데 소토요."

바스케스 반장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관심 없어."

"이건 살인 사건입니다. 그리고 경찰이면 응당 살인사건에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나요?"

"그 수사는 며칠 전에 종료했네. 자네가 늦었어."

"그러면 재수사를 해야죠. 내가 그 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편지? 그러니까 파하리토 데 소토가 썼다는 편지 말인가?"

네메시스 카브라 고메스가 먹다가 멈췄다.

"그건 관심이 있나요?"

"아니."

바스케스 반장이 말했다. - p. 170.





. 1927년 1월.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30여년을 살다 미국으로 건너와 증권사 영업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 한 남자가 판사 앞에서 진술을 하고 있다. 하비에르 미란다라고 하는 이 남자는 판사의 질문에 따라 그의 고용주였던 코르타바녜스와 르프랭스라는 남자에 대해 진술하고, 그 진술에 기업의 이전 오너였던 사볼타의 모습이 언뜻 드러난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20세기 초 스페인의 혼란스러운 정세가 드문드문 소개되고, 그 과정에서 사볼타 기업의 공장 노동자인 파하리토 데 소토가 교통사고로 죽고, 대표인 사볼타가 총에 맞아 암살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이들 사건의 배후에, 사볼타의 후계자였으며 사볼타가 죽은 후에는 그의 딸인 마리아 로사와 결혼한 르프랭스가 자리하고 있다.





파하리토 데 소토는 토요일 새벽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통해 사망했다. 토요일 자정 무렵 누군가가 바바리로 몸을 감싼 남자 두 명을 보고 지나가던 순찰 경관에게 말했다는 얘기도 있었고, 파하리토 데 소토가 수수께끼의 편지 한 통을 우체통에 집어넣었다는 얘기도 있었고, 파하리토 데 소토의 아내와 아들이 메모도 없이 서둘러 도망쳤다는 얘기도 있었다. 나는 경찰의 심문을 받았지만, 아무것도 모르며,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나는 괜한 얘기를 꺼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 p. 113.





. 법정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교통사고와 총성이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절로 하드보일드의 도입부가 떠오른다. 실제로도 이 소설은 주인공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한다는 걸 제외하면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소설의 문법대로 진행되어 간다.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다 음모에 짓눌려버리는 인물들, 뒤늦게 사건을 수사해보지만 벽에 부딪히는 경찰들. 진실은 점점 묻혀가고 흑막인 르프랭스는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며 거물이 되어간다. 하지만 그 정점에서 르프랭스는 파멸하고, 진실이 밝혀진다.


. 하지만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이러한 정리는 끼워맞추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우선 이 사건을 서술하는 미란다는 사건 해결에 있어선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력할 뿐이다. 경호원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야기 내내 르프랭스와 가장 근접한 곳에 있는 미란다인데도 불구하고, 르프랭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 채 자신의 사랑에 푹 빠져 고뇌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경찰이 이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려 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그들의 제보를 묵살했으며, 뒤늦게 몇 가지 우연이 겹쳐져 진실이 드러났을 땐 르프랭스는 이미 스스로 파멸해버린 뒤였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잘못된 수사로 인해 억울한 이들이 누명을 쓰고 사형당하는 일까지 벌어지지만 어차피 그들은 언제고 죽을 이들에 불과했다며 태연자약할 뿐이다. 그렇게 몇몇 사람들에게만 진실이 알려진 채 사건은 묻혀진다.





"반장님이 떠난 이후로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저는 수사 현장에서 물러나 여권과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반장님의 후임이 르프랭스를 더 이상 감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래서 반장님께서 떠나기 전에 저한테 당부하신 말씀도 있고 해서 계속 관심을 두고 그를 주시하기는 헀지만, 결국 이런저런 상황에 떠밀리다 보니 그에 대해 알아낸 건 별로 없습니다."

- p. 212.





. 그렇기에 추리소설에 더없이 가까운 이 소설은, 오히려 '안티 추리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추리소설에 무능한 경찰은 수도 없이 등장하며, 악인에 가까운 탐정도 많고, 무기력한 주인공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인물이 등장하건 간에 추리소설이라면 '진실'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설령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묻혀지는 진실이라도 그 중요성은 어떻게든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사건의 진실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르프랭스는 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곳에서 다른 건으로 파멸했고, 누명을 쓴 이들은 여전히 사볼타의 살인범으로 남아있으며, 진실을 밝히려 했던 이들은 그 진실에 짓눌린 채로 잊혀져 간다. 누구도 그들의 결백과 명예회복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 사건의 수사를 저지하는 윗선의 정체는 그 윤곽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란다는 미국으로 건너가 르프랭스가 남겨둔 보험금으로 부인과 부유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르프랭스의 부인은 남편을 자랑스러움과 긍지로 기억하며 살고 있다. 이토록 의미없는 진상, 이토록 가치없는 진실이라니.


. 진실 대신에 이 이야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시대가 붕괴되어 가는 모습이다. 1차대전 막바지인 1917년.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에 전쟁을 피할 수 있던 스페인은 1차대전 내내 양쪽 진영에 무기와 물자를 공급해가며 큰 돈을 벌었지만, 그 돈은 일부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에게만 흘러들어갔다. 결국 쌓여가던 국민의 불만은 폭동으로 이어지고, 여기에 종전으로 전쟁특수가 끝나고 경제공황까지 겹치면서 스페인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워진다. 그로 인해 좌-우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좌파가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우파와 군부가 손을 잡고 벌인 쿠데타는 스페인 내전으로 이어진다. 어쩌면 저자는, 파멸로 치달아가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사건의 진상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보여주려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처음에는 딱 한 발의 굉음이었다. 동시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총성이 이어졌다. 머리 위로 총알들이 핑핑 날아다녔지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온몸이 마비된 채 꼼짝할 수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웅크린 채 바닥에 엎드리거나 피신처를 찾아 가까스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첫 두 발의 총성이 울린 다음 몇 발의 총성이 더 울렸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총소리가 계속된 것만큼은 분명했다. 나는 바닥에 엎드린 르프랭스와 마리아 로사 사볼타를 보고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불을 끄고 모두 몸을 낮추라고 지시하는 클라우데데우를 보았다. 누군가 "불! 불!" 하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부상당하기라도 한 듯 비명을 질렀다. 총성은 곧 멈췄다.

-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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