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문화사 3권. 1880~1920 - 도널드 서순 ●●●●●●●◐○○
부르주아 문화를 상징하는 장르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 장르는 탐정소설이다.
한 번이나 두 번을 넘겨서 실패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저자는 그리 없다. 저자라면 누구나 자기 책이 되도록 널리 판촉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출판업자는 광고, 포스터, 인터뷰, 화려한 표지 그림, 서점에서의 진열 따위의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일부 작가들은 자신을 마케팅하는 데에 능숙해졌다. 디킨스는 사실상 흥행사가 되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와 오스카 와일드는 미지, 특히 괴팍한 이미지를 개발하는 것이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중략) 경쟁이 더욱 뻑뻑해진 환경에서, 저자는 스스로를 경쟁자들과 차별화해야 했다.
- p. 73. 소설의 국제화.
. 유럽 문화사 시리즈의 각 권당 비중을 보면, 19세기 초를 다룬 1권에선 540쪽 중 300쪽이 책에 대한 이야기에 할애되었다. 19세기 중반을 다룬 2권에서는 이 비중이 조금 더 늘어서 책에 대한 이야기가 520쪽 중 350쪽을 차지한다. 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다루는 3권에 이르면, 책에 대한 이야기는 450쪽 중 200쪽 정도로 줄어든다. 이렇듯 20세기에 이르면 문화 컨텐츠들이 다변화되어 책의 압도적인 위상은 점점 자리를 감추고, 그 자리를 쇼, 음악(이 시기부터 녹음된 음반이 전세계를 휩쓸게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영화가 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21세기까지 200년 간의 유럽문화사를 다룬 5권 중 이제 3권을 읽었는데, 과연 이어지는 4-5권에서는 이러한 비중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하다. :)
. 3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문화의 내용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이 문화시장을 좌우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2권에서 등장했던 빅토르 위고, 쥘 베른, 알렉상드르 뒤마와 찰스 디킨즈, 그리고 러시아의 거장들이 소설에 대한 반대여론을 완전히 진압하고(!) 소설의 전성기를 열었고, 여기에 에드거 앨런 포에서부터 시작된 추리소설이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블랑 등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한다. 하지만 이와 함께 교통과 운송, 통신과 제작기술의 발전은 이제 축음기 하나와 음반 한 장만 있으면 전세계 어디에서든 동일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그전까지 한정된 장소에서 소수만이 즐길 수 있던 '음악감상'이라는 취미를 대중의 것으로 바꿔놓았다. 책의 독주가 끝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된 세계 영화의 미국화 과정을 촉진했다. 전쟁은 영화의 자유로운 이동을 끊어버렸다. 외국인 기술자들은 자국 군대에 복무하기 위해 돌아가야 했다. 총동원령이 내려져서 스튜디오가 텅 비었다. 영화관은 문을 닫았다. 뉴스릴은 제한되었다. 영화는 세계주의에서 국가주의로 빠르게 이동했다. (중략) 프랑스의 영화생산은 곤두박질 친 반면, 미국의 영화생산은 양적, 질적으로 팽창했다. 1919년에 이르러서는 파라마운트 사 혼자서 이전 2년 동안 제작한 351편의 영화를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 p. 384. 영화 : 유럽 영화와 미국 영화.
. 하지만 진정한 게임체인저는 영화였다. 1895년 12월 28일에 처음 시작된 영화상영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유럽 전역은 물론 인도와 중남미, 일본에까지 퍼졌고, 처음엔 열차가 달려오는 1분짜리 장면에 지나지 않았지만 20년 만에 190분짜리 대하역사극 '국가의 탄생'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특히, 그동안 모든 문화가 유럽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면, 영화산업만큼은 미국이 유럽을 압도했다. 이는 전체 문화에서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전체 문화시장에서 미국이 유럽을 추월하고 주도권을 잡는다는 걸 의미했다.
. 이렇듯 1880년대에서 1920년대의 40년은 문화의 주류와 문화를 주도하는 주체가 한꺼번에 바뀌는, 이 책의 소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혁명'의 시대였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이르면 추월은 더욱 가속화되고, 굳히기는 더욱 견고해지게 될 것이었다.
독자는 탐정소설이 어떻게 끝날지를 잘 안다. 미스테리는 풀리고 범인은 잡힐 것이다. 누가 범인인지, 어떻게 범인을 찾아낼 것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앞으로 알게 될 것이다. 탐정소설의 핵심은 도덕적 정의가 아니다. 피해자는 죽임을 당해 '마땅한' 자일지도 모르고, 살인자에게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탐정소설의 핵심은 '진실'이다. 디킨스, 쉬, 위고에게 나타난 사회적 딜레마는 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냉정한 요구로 대체되었다. 부르주아 문화를 상징하는 장르를 선택해야 한다면(하지만 안타깝게도, 삶은 이보다 복잡하다) 그 장르는 탐정소설이다. 19세기에 이루어진 그 모든 내러티브 혁신 가운데 탐정소설이 가장 성공적이고, 생명력이 길고, 모든 계급의 사랑을 받으면서 쉽게 연극, 영화, 텔레비전으로 각색되어 왔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넓은 장르 안에서 차츰 종속적인 주제들이 등장했다. 점점 더 교묘한 범죄가 점점 더 교묘한 방식으로 저질러졌다. 가난처럼 평범한 범죄 원인은 무시되었다.
- p. 152. 범죄 이야기와 과학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