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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함과 우직함이 이뤄낸 결실

쌍두의 악마 - 아리스가와 아리스(시공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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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서른을 맞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다. 아마도, 학생인 채로.




"어머니는 어떤 점술에 광신적으로 빠져 있었어. 위암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계시를 남겼지. '너는 서른을 맞지 못하고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다. 아마도, 학생인 채로."

나는 망설였다. 뭐라고 대답하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을까? 웃는 표정을 지을까?

"에가미 선배는 점술 같은 거 믿지 않는 타입이죠?"

그 말밖에 못했다. 부장은 담배를 입에 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렇다면 서른까지 학생으로 있어주마, 하는 사고방식은.... 어떨까."

"...."

"형이 열아홉에 죽었어. 어머니는 형에게 '스무 살까지 살지 못할 아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정신 나간 어머니였어."

- p. 182. 사냥꾼의 이름.





. 데뷔작 '월광게임'부터 항상 아쉽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성실함과 우직함만큼은 항상 기대해왔는데, 쌍두의 악마는 그런 작가의 노력이 드디어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작품이다. 비록 700페이지를 훌쩍 넘어 8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본격추리치고는 너무 길다 싶고,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힘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사건의 트릭에는 빈틈도 작위적인 부분도 없다. 보통 본격추리물을 읽을 때 - 그리고 범인을 맞추지 못했을 때(^^;)는 어떻게든 빈틈을 찾아보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빈틈도, 억지스러운 반전도 없다. 그냥 직구, 직구, 직구. 그리고 보기좋게 삼구삼진. :)


. 전편 '외딴 섬 퍼즐'에서 충격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려 마음의 상처를 입은 마리아는 집을 떠나 이곳저곳을 여행하다 외부인의 출입을 거부한 채 예술가들만 살고 있다는 기사라 마을에 틀어박히게 되고, EMC(에이토 대학 미스테리 클럽) 멤버들은 그런 마리아를 찾아 기사라 마을 건너편에 있는 나쓰모리 마을에 진을 친다. 한편 기사라 마을 내부에서는 마을을 개방하자는 사람들과 이대로 놓아두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나쓰모리 마을에서는 온갖 스캔들에 휘말리다 폭식증에 걸려 기사라 마을에 틀어박힌 여자 아이돌을 취재하려는 카메라맨이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여기까지가 무려 150쪽, 그리고 첫 살인사건까지가 250쪽. 그나마 중간에 액션을 빙자한 단체 개그씬(....)이 있기에 망정이지, '인물을 소개하고 분위기를 잡는' 추리소설에서 가장 지루한 부분이 무려 250쪽이나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말주변으로 좌중을 사로잡는 스타일도 아닌데.





"이 두 개의 사건은, 범인은 알아냈지만 범행 동기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수수께끼가 두 개로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인 경우도 있습니다. 실례했습니다. 아직도 에둘러 말하고 있군요." 에가미 선배는 자기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중략)

"두 사건 다 범인과 피해자의 조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한 조합을 뒤바꿔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합을 뒤바꾼다?"

그녀는 처음으로 가벼운 동요를 드러냈다. 마른침을 삼킨 것이다. (중략)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교차 살인이었던 겁니다."

- p. 330. 실락의 향기.





. 그런 초반부를 빠져나오면 본격적인 수수께끼 풀이가 시작된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독자들에게 총 세 명의 살인자와, 사건의 동기를 맞출 것을 요구한다. 거기에 엘러리 퀸의 작법을 충실하게 따르는 작가답게 제대로 꼼꼼하게 읽었다면 누구나 다 맞출 수 있다며 '독자와의 대결'을 거는 페이지를 따로 만들 정도. 다만 신본격 중에서도 정통파를 표방하는 아리스가와 아리스답게 10분, 20분의 빈틈을 기가 막히게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 '꼼꼼함'이라는 게 모든 인물들의 위치와 행동을 일일이 타임테이블에 맞게 분단위로 정리해줘야 하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작가가 요구하는 수준(....)으로 꼼꼼히 읽었다면 맞출 수 있는 문제인 것은 맞다. 원래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소설은 왠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트릭을 만들었으니 읽는 사람도 그 정도의 노력은 보여달라'는 느낌이 강하긴 해서. :)


. 또한 이번 작품에선 인물들의 매력도 한결 더해져 있다. 그동안 에가미 선배의 병풍으로 개그씬을 담당하는 정도였던 EMC 멤버들이 대활약을 펼치는데, 아리스와 모치즈키는 에가미 선배가 빠진 상황에서도 서로 도와가면서 나쓰모리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면서 탐정으로 성장하고, 오다는 하드보일드팬 답게 장쾌한 액션을 선보인다. 다음 작품인 '여왕국의 성'에서는 에가미 선배가 사라지고 나머지 EMC 멤버들이 그를 찾아나선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 업그레이드(?)한 그들이 또 한 번 활약을 펼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 여기에 아리스와 마리아, 에가미의 엇갈리는 묘한 분위기에다 에가미가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으면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이고, 마리아의 꿈 속에서 '작가 아리스'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등 독자 서비스까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꾸준히 응원해 온 독자라면 여러모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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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소설은 1992년에 영화화되었는데, 우리에겐 '한자와 나오키'로 잘 알려진 카가와 테루유키가 주연을 맡았다. 스물 일곱의 젊은 카가와 테루유키를 볼 수 있는데, "젊었을 때 노안은 나이가 들면 동안"이라는 말을 입증하는 것처럼 주름이 좀 더 많아진 걸 빼면 지금과 거의 차이가 없는 얼굴이다. :) 표지를 보면 에가미 선배를 제외한 나머지 EMC 멤버들은 공기화 된 것 같지만, 그나마 다행히 여주인공이라고 마리아는 살아남은 것 같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여러 번 만화화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영화로도 나왔었구나. :)




"하지만 이유야 어떻든, 일곱 살 차이 나는 에가미 선배가 같은 시기에 에이토 대학에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에가미 선배에게서 돌아온 말은, 내가 예상치도 못한 대답이었다.

"고마워."

- p. 187. 사냥꾼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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