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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은 눈이 좋다.

제3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2007년) - 침이 고인다(김애란) 外

by 눈시울
2007년_이상문학상.jpg



1) 침이 고인다 - 김애란


그녀는 '그러니까'와 '그렇지만' 사이의 깊은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며 선잠에 빠져든다. 물론 직장에 택시를 타고 갈 생각은 없다. 그녀는 자신이 아침마다 일어나는 데 필요한 것 중 하나가 결심이 아닌 '주저'라는 걸 알고 있다. 그 주저의 순간, 자신에게도 삶에 대한 선택권이 약간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는 것도. 그녀가 화들짝 깨어난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정신병자처럼 외친다. 몇 시지? 늦은 건 아니지만 늦을지도 모르는, 세계 도처에 깔린 우리의 난처한 시간 - 그 어디 즈음의 몇 시 몇 분이다.

- p. 242.


'오늘은 체육대회가 있는 날인데.' 그녀는 오늘 이어달리기 선수로 뛰어야 한다. 회의 때, 응원이나 하겠다고 발을 뺐지만, 누구든 한 가지 종목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해 어쩔 수 없었다. 부장이 달리기 지원자를 물었을 때, 그녀는 지목당하지 않으려 한껏 고개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한 손을 번쩍 들더니 '저는 박 선생님을 추천합니다'라고 말했다. 퇴근 시간마다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 죽도록 뛰는 모습을 봤는데, 아주 잘 뛰더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울적한 표정으로 팬티가 물에 불기를 기다린다. 살면서 사내 체육대회 우승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절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벌써 예선도 치렀고 티셔츠도 받았다. 예선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일등을 해버리는 바람에 더욱 우울해져 버렸다.

- p. 243.


그녀는 목동에 있는 입시학원에 나가고 있다. 중등부 1학년만 천 명이 넘는 기업형 학원이다. 그녀는 국어과에서 중등부 강의를 맡고 있다. 처음 면접을 보러 다니던 때, 그녀는 자기 몸값을 스스로 불러야 한다는 사실에 당황했었다. 어느 학원에선가 '우리는 달라는 대로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선생님이 천만 원 달라고 하면 천만 원 줄 수 있고, 육백만 원 달라고 하면 그럴 수 있다. 다만 우리는 그 값어치를 하는 사람을 못 구하고 있을 뿐이다. 선생님은 얼마를 원하느냐?' 라고 물어왔을 때도 그랬다. 그녀는 가죽 소파 위에 쥐며느리처럼 앉아 고뇌했다. 적게 부르면 사람이 무능한 것 같고, 많이 부르자니 뻔뻔해 보일 것 같았다. 그녀는 원장이 대단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그것이 왜 이상한 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수치심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 p. 244.



. 4년 전에는 작가의 단편집으로, 이번에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으로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를 다시 읽었다. 유머러스하게 쓰여졌지만 도저히 웃을 수는 없었던 초반의 직장생활 부분은 반가웠고 왜 제목이 '침이 고인다'였는지를 말해주는 뒷부분은 영 기억이 나질 않아 낯설었다. 아마도 읽고 싶은 부분만을 읽고 나머지는 잊어버렸었나보다. 그 때 썼던 리뷰를 보니 '김애란은 눈이 좋다'고 시작했는데, 다시 읽어도 역시 그렇다. 늘상 같은 듯 하면서도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버거운 일상을,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김애란은 마치 일기를 써내려가듯 인물에 바싹 붙어 묘사해나간다. 그렇게 현실이 탄탄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일상과 살짝 거리감을 두는 것만으로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2) 첫 번째 기념일 - 편혜영


다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다 필요없는 자격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력만으로 도시에 있는 직장에 취업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은 이력서를 써 보내도 마찬가지일 거였다. 그는 여전히 변두리의 구직자로 남을 것이다. 그나마 신도시가 완공되면 그가 사는 곳도 도시의 일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게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반지하방을 전전하는 생활이 나아질 리 없다는 생각에 치욕스럽기도 했다. 그게 뭐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치욕이나 위안이 인생을 바꾸지는 못했다.

- p. 225.



. 재개발을 앞두고 비워져 가는 동네와 재개발 붐에 편승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진 '그'. 비어가는 도시에 남겨져 이제는 받을 사람이 없는 택배를 배송하는 그는 받을 사람이 없는 택배를 뜯어보는 것으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알아간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끝에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재개발에 살던 곳을 내주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살아가면서 동네에 덩그러니 남겨진 놀이공원을 관리하는 '그녀'를 만나 관람차의 곤돌라 안에서 그가 뜯어본 물건값을 보상하면서 나는 이제 그녀를 '만난 것이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트럭의 시동을 걸고 다른 물건을 배송하러 출발하는 그의 등 뒤에서는 더 이상 곤돌라를 찾을 수 없다. 주인공을 향한 작가의 이런 장난스러운 악의는, 이 이야기의 제목에서 정점을 찍는다. '첫 번째 기념일'.





3) 내겐 휴가가 필요해 - 김연수


그는 우선 도서관에서 걸음으로 10분 정도 떨어진, 바다가 보이는 언덕배기에 전셋집을 구하고 남은 돈을 차명계좌에 모두 집어넣었다. 처음 한 달은 실험의 기간이었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끊어버렸다. 아침과 저녁, 두 끼만 먹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고기를 구워먹었다.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에는 일어나 도서관 뒤 공원에서 운동했다. 한 달 뒤, 그는 생활비로 은행에 넣어둔 원금을 나눠보았다. 계산대로라면 적어도 10년 동안은 원금을 빼먹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원금에 다달이 이자가 붙으니 그 기간은 더 늘어날 것이었다. 그 정도 기간이면 자신이 계획한 일을 모두 끝마칠 수 있으리라. 모든 계산을 마친 그는 그때부터 도서관에 나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 p. 125.



. 과거의 묵직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삶을 버리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내내 고민해 온 노인과, 그에 대비되어 여름휴가 시기를 두고 갈등을 벌이는 도서관 직원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의 현재의 단절을 이야기하며 현재의 개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 자체는 안이하게 느껴졌지만, 어느 날 문득 직장도 기존의 삶도 버린 채 바닷가 마을에 파묻혀서 10년 동안 매일매일 도서관에 있는 도서분류기호 300번대와 900번대의 책을 읽는 중늙은이라는 설정과, 그 설정을 풀어내는 김연수의 문장은 마음에 들었다. 생각해보면 작가의 의도는 내 읽기와는 전혀 달랐겠지만, 어쩔 수 없지 뭐. :)





4) 수상 소감 - 전경린


겨울 해안 길을 걸을 때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생명은 착함이다. 하지만 생명력은 교조적인 윤리나 굳은 관습, 안전한 제도, 방어적인 도덕성에 정주하는 데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개체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정화하며 침범하는 무감각에 대항해 거듭 자신을 새롭게 낳는 힘이다. 타성에 젖어 산 채로 죽음에 잠식되어 가는 존재들이 도처에 만연하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생의 최고의 사치인지도 모른다. 수상 작품의 제목은 그래서 붙여졌다. 천사는 여기 머문다. 그것은 선악의 의미를 넘어 우리 생애 내부에서 비상하는 생명을 은유한다. 살아 있음의 절정에서 당신의 얼굴에 천사가 떠오른다. 천사는 생명이다.

- p. 308.



. 비슷한 시기의 현대문학상 대상이었던 '강변마을'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전경린은 문학적으로 참 반듯한 모범생이다. 진지하고, 삶이 무엇인지 정면에서 고민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다루지 않는 이야기를 흘려보내지 않고 하나하나 붙잡아 차곡차곡 챙겨둔다. 그래서 2007년의 이상문학상 대상도, (특히) 2011년의 현대문학상 대상도 심사과정의 격론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경린에게 돌아간 게 아닐까 싶다. 내가 나이 지긋한 심사위원인데 요즘 세상에 '겨울 해안 길을 걸을 때면 생명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생명은 착함이다. 하지만 생명은 교조적인 윤리나 굳은 관습, 안전한 제도, 방어적인 도덕성에 정주하는데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개체마다 독특한 삶의 경험 속에서 스스로 정화하며 침범하는 무감각에 대항해 거듭 자신을 새롭게 낳는 힘이다. 타성에 젖어 산 채로 죽음에 잠식되어 가는 존재들이 도처에 만연하다.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은 생의 최고의 사치인지도 모른다' 같은 글을 단호하게 쓸 수 있는 작가를 만난다면, 반가워서라도 상을 줄 테니까. :)





그리고.

천사는 여기 머문다 - 전경린(대상)

빗속에서 - 공선옥

아버지와 아들 - 한창훈

약콩이 끓는 동안 - 권여선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 - 천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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