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2. 밀란 쿤데라 그리고 농담

1929. 4. 1. ~ 2023. 7. 12. 부디 편안하시길.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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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란 쿤데라의 서거 소식을 듣고, 그의 책 중에서 유일하게 읽고 리뷰한 '농담'의 리뷰를 찾아 읽었다. 이야기 속에서 그의 인물들은 좌절되어버린 평생의 목표와 이제는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실패를 끌어안고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치기어린 농담 한 마디에 그동안 쌓아왔던 것들과 계획과 미래와 꿈이 모두 무너져내리고 이제는 아무 의미없는 복수조차도 이루지 못하는 루드비크와 평생을 쏟아부어 민속 음악의 최대 권위자 자리에 올랐지만 자신이 평생 걸어온 길이 거짓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야로슬라브. 그들은 이야기 속에서 그동안 자신들이 살아온 길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과 직면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역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아무리 꿈과 희망과 가능성을 부르짖어도, 인생이란 건 유한할 수 밖에 없기에, 언젠가는 수긍해야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온다. 그들은 그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쿤데라는 이렇게 너무나도 쓰디쓴 지점에서 '그 다음'을 이야기한다. 아무 의미없는 유치한 복수조차 이루지 못한 루드비크는 인생의 정점에서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다는 걸 깨달은 야로슬라브와 몇십년만에 재회한다. 그리고 루드비크는 야로슬라브에게 같이 연주하자는 말을 건네고, 야로슬라브는 고마워하며 루드비크의 제안을 반갑게 수락한다. 그리고 그들은 행사장을 떠나 청중 없는 벌판에서, 그들이 원하는 곡으로 그들만의 연주를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야로슬라브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연주는 도중에 중단된다.


. 이렇듯 이 책에서 쿤데라는 그의 인물들에게 더할 나위없이 매몰차다. 그들을 실패와 좌절로 몰아넣고, 이젠 더 이상 역전은 없을 거라는 걸 보여준다. 루드비크가 몇십년 전 헤어졌던 옛 친구와 손을 잡고, 야로슬라브가 그 순간만큼은 당과 이념을 떠나 자신만을 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해서, 루드비크의 인생이 남들이 보기에 극적으로 대역전을 이루고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는 일이 일어나거나, 야로슬라브가 '당의 음악'에 허비한 세월을 만회하고 진정한 자신의 음악으로 우뚝 서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자신들만을 위한 연주조차 끝마치지 못한다. 쿤데라가 작품 속에서 그려내는 현실은 이렇듯 냉혹하다.


. 하지만, 쿤데라는 그럼에도 - 그런 상황에서도, 그게 어떤 모습이거나 어떤 형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다음'은 있다는 걸 보여준다. 또한 비록 끝까지 연주하지 못했고 언젠가 둘이 다시 연주할 수 있을지조차 확실치 않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 분명, 그들이 연주를 시작했던 그 순간과 그 마음만은 확실히 있었다는 걸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역전으로 '끝'을 맺는 수많은 책들보다 더 큰 위로를 준다.



- 1929. 4. 1. ~ 2023. 7. 12.

감사합니다. 즐거웠고 위로받았습니다. 부디 편안하시길.





"낙천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 따윈 바보스런 것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

- p. 54.



"동지 여러분, 그것은 농담이었습니다."

- p. 58.



그리고 얼마쯤 지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루드비크였다. 나는 다음 일격을 기다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이제는 내게 해를 입힐 만한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루드비크는 내 바로 옆에 앉아, 오후에 있을 연주 준비는 다 되었느냐고 물었다.

"자네가 그곳에 가고 싶다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네."

"그 연주를 들으려고 이 도시에 왔나?"

"아냐, 그래서 이 곳에 온 것은 아냐. 하지만 일이란 우리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끝나는 거야."

"그래,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식으로 말이지."

"나는 이 근처의 벌판을 벌써 한 시간 동안이나 서성거리고 있었지. 그런데 이곳에서 자네를 만나다니."

"나도 마찬가지야."

잠시 후 루드비크는 "그런데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네만" 하고 말했으나, 나의 눈을 정면으로 보지는 않았다. 블라스타와 마찬가지로, 그는 내 눈을 정면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경우는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 눈을 보지 않는 것이 내심 기뻤다. 내게는 그것이 부끄러움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이 부끄러움이 나를 따뜻하게 하고 치유해주었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데" 라고 그는 말했다.

"오늘 자네들과 함께 연주시켜 주지 않겠나?"

- p.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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