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30. 폴 오스터를 아쉬워하며

1947. 2. 3. ~ 2024. 4. 30. 부디 편안하시길.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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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




. 그러고보면 내게 있어 폴 오스터는 유독 젊게 느껴지는 작가였다. 그의 글은 항상 뜨거운 열정과 젊은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인물들 역시 대부분 젊고 자신들이 느끼는 감정을 - 그게 희망이든 절망이든 - 순도 100%로 표현하는 이들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그가 내가 아는 작가들 중에서(몇몇 장르문학이나, 한국작가들을 제외하고) 가장 젊은 축에 들 거라고 생각했고, 형뻘, 기껏해야 사촌형뻘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는 두어세대 앞에 있었지만.


. 거기다 그의 데뷔나 국내소개가 늦었던 것도 그런 즐거운(?) 오해에 한몫했다. 아직 길을 잡지 못하던 시절에 쓴 '스퀴즈 플레이'를 제외하면 그의 본격적인 첫 소설이라 할 수 있는 '뉴욕 3부작'은 그가 40대에 들어선 1987년에 나온 책이고, 열린책들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소개된 건 그가 50대 중반이었던 00년대 초중반의 일이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뉴욕3부작을 가장 먼저 읽고(이건 확실하다), 이어서 '우연의 음악'을 읽고(이건 좀 애매하긴 하다) 폴 오스터에 완전히 빠져서, '달의 궁전'이나, '공중곡예사'나, '신탁의 밤'이나, 스퀴즈 플레이 같은 그의 작품들을 정신없이 읽어댔다. 그런 '폴 오스터의 시대'라고 이름붙일 만한 광풍은 더 이상 그의 책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 폴 오스터는 그의 글에서 지극히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잡담으로 여겨질 법한 어투를 가지고 등장인물들이 겪는 비일상을 '어마어마한 속도와 분량'으로 쏟아낸다. 처음에는 그렇게 쏟아내는 말의 홍수에 허덕거리기 바쁘지만, 그렇게 그의 문장을 허겁지겁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묘한 리듬감이 느껴진다. (힙합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지만) 실력있는 래퍼들이 그 빠르디 빠른 랩을 단어와 억양, 들이마시고 내뱉고 쉬는 타이밍을 통해 듣는 사람의 귀에 탁탁 꽂아넣을 수 있는 것처럼(그걸 딜리버리라고 한단다) 폴 오스터의 문장 역시도 읽다보면 마치 눈에 들어와 박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부터는 미친 듯한 속도로 흘러가는 그의 이야기에 속도를 맞추게 된다. 그렇게 나는 폴 오스터의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일생의 도박에 실패해 아무것도 없는 땅에 아무 의미도 없이 돌로 벽을 쌓는 남자의 이야기, 극도의 무기력과 가난에 빠진 채 파멸을 향해 가다가 휠체어를 탄 기묘한 노인과 주변의 인물들에게 갑작스러운 구원을 받는 청년의 이야기, 탐정과 의뢰인과 의뢰대상의 기이한 이야기, 심지어 공중에 뜰 수 있는(!!) 소년의 이야기까지.


. 그렇게 폴 오스터는 다른 몇몇 작가들과 함께 내 젊고 불안정하고 흔들리기 쉬운 시간들에 내내 함께 했다. 그의 이야기는 마냥 자유로운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땅에 발을 단단히 붙이고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건 내 삶의 위치를 잡아가는 것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 운이 좋고 고맙게도, 그의 작품이 쏟아져나오던 시기는 내게 그런 이야기들이 가장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다. 그의 젊고 열정적이고 순도 넘치는 이야기는 내게 여러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다양함 속에서도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 내딛어야 할 삶의 방향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기에.



. 1947. 2. 3. ~ 2024. 4. 30.

감사합니다. 즐거웠고 위로받았습니다. 부디 편안하시길.




저는 소설의 현 상태,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책에 관련해서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언제나 독자는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은 특별한 힘을 지니며, 제 견해로는,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2006년 10월.

-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p. 450.


p.s. 이렇게 말하던 폴 오스터는, 모두들 이제 늙고 병들고 가족의 상실이라는 큰 슬픔을 겪은 그에게 또다른 작품을 기대하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하던 그 시기에도 그의 말을 지키며, 우리에게 4321이라는 대작을 남기고 떠났다. 이제, 다시 맨 앞으로 돌아가 그의 책을 읽어내려가야겠다.




1972년 1월 3일, 나는 레이크 앨시노어라는 곳에서 다섯 켤레째 신발을 사 신었고 그로부터 사흘 뒤에는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채 라구나 해변마을로 이르는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내 호주머니에는 4백 13달러가 들어 있었다. 그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태평양이 한눈에 들어왔지만 나는 물가에 이를 때까지 내리막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내가 신발을 벗고 발바닥에 와 닿는 모래를 느낀 것은 오후 네 시였다. 나는 세상 끝까지 온 것이었고 그 너머로는 바람과 파도, 중국 해안까지 곧장 이어진 공허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가 내 출발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여기가 내 삶이 시작되는 곳이야.

나는 마지막 남은 석양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그 해변에 서 있었다. 내 뒤쪽으로 라구나 해변 마을이 귀에 익은 세기말의 미국적 소음을 내며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해안의 굴곡을 바라보고 있을 동안 한 집 두 집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다음에는 언덕 위에서 달이 떠올랐다. 달아오른 돌처럼 노란 둥근 보름달이었다. 나는 그 달이 어둠 속에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 눈 한 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 달의 궁전, p.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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