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섭 감독의 섬세한 감성이 묻어나는 영화 <메기>가 전하는 메시지
* 포스팅에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묵직한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낸, B급인 척 하는 A급, 믿음과 불신에 관한 재기발랄한 고찰, 특유의 유머와 감각적인 센스의 기막힌 조합 ・・・.
이옥섭 감독의 영화 <메기>를 수식하는 딱 맞는 언어를 고르고 싶은데 그 어떤 문장을 붙여도 보기 전까진 이 영화의 매력을 가늠조차 할 수 없으리라.
그래도 말하자면 <메기>는 가벼운데 무겁고, 웃긴데 씁쓸하고, 관객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 예상 못 한 반전을 끼얹는, 이상해서 매력적인 영화다.
영화소개
| 이 곳은 마리아 사랑병원. 오늘은 민망한 엑스레이 사진 한 장으로 병원이 발칵 뒤집혔어요! 세상에! 저를 가장 좋아하는 간호사 윤영 씨는 소문의 주인공이 자신과 남자친구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어요 과연 윤영 씨는 이 의심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아,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메기입니다.
우리가 아는 진짜 그 ‘메기’ 시점의 조금은 독특한 영화다. 하지만 난해할 것 같다는 이유로 찜 목록에 2년 동안이나 묵혀둔 게 후회될 정도로, 익숙하고도 낯선 배우들의 단단한 응집력과 현실과 비현실적 요소를 엮어낸 기막힌 연출은 이제껏 여느 영화에서 보지 못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영화가 꼬집는 주요 키워드는 불법촬영, 관음, 억압, 폭력, 실업, 그리고 불신이다. 믿음과 불신의 간극에서 현실을 반영한 다양한 사건들이 전개되는데, 그 방식이 환상적인 상상과 결합해 발랄한 분위기를 형성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메시지는 분명하고 날카롭다.
첫 번째 사건은 영화의 주된 배경인 마리아 사랑병원에서 시작된다. 어느 밝은 한낮, 마리아 사랑병원에 여성과 남성의 성관계 장면이 찍힌 민망한 엑스레이 사진이 걸린다. 이른바 ‘섹스레이’ 속 주인공들이 누구냐며 수군수군, 병원은 발칵 뒤집힌다. 그런 와중에 간호사 윤영은 사진의 주인공이 자신과 남자친구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의심에 휩싸인다.
이때, 메기의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병원 사람들의 탐정 놀이가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이 사진의 주인공인지.
엑스레이 버튼을 눌러 남의 사생활을 찍은 자에겐 관심도 없죠.
찍힌 게 누구인가. 그것에만, 그것에만 관심을 보였어요.
영화는 메기의 목소리를 빌려 ‘불법촬영’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비판한다. 불법촬영물을 두고 누가 찍었느냐가 아니라 누가 찍혔냐를 궁금해하는 관음적 태도가 만연하다. 집단적 관음과 정조 관념은 가해자를 구원하는 데에만 쓰일 뿐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니 한 번 더 목소리를 보태는 메기의 일침이 반가울 수밖에야.
걱정되는 윤영은 사진을 집으로 들고 갔고, 남자친구 성윤은 ‘섹스레이’ 사진을 자신의 몸에 대보며 의심을 키운다. "내 꺼 맞는 거 같은데・・・" 의심은 생각보다 쉽게 확신이 된다.
영화에서 윤영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게 성원이었다. 엑스레이 사진을 대보는 엉뚱함과 여자친구 사직서의 서체를 고민하는 귀여움 그리고 여자친구 다리의 멍을 그림으로 가려주는 다정함은 나도 모르게 그를 무해한 영역에 놓게 했다. 그런데 윤영이 성원의 전 여자친구인 지연의 이야기를 듣고부터 둘의 관계는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지연이 고백한 건 다름 아닌 그에게 맞았다는 사실이었다. 지연은 현 여자친구 윤영에게 데이트폭력을 경고해준 셈이었고, 윤영은 다시 의심의 구덩이에 빠지게 된다. ‘이 사람이 정말 때렸을까, 나를 해치진 않을까’ 하고서는. 남자친구의 사소한 행동도 이전과는 다르게 살피기 시작한다. 불신의 구덩이와 불안감은 점차 깊어졌고 윤영은 고심 끝에 그곳을 빠져나오기로 한다.
“너, 여자 때린 적 있어?”
그러자 그의 입에서 "어, 전여친 때린 적 있어"라는 충격적인 대답이 나온다. 그 말이 나오기 직전까지 내가 성원을 믿고 싶어 했다는 사실에도 나는 적잖이 놀랐다. 영화에서 지연의 서사보다는 성원의 서사를 오래 보여줬기 때문일까, ‘그럴 사람이 아니다’라는 믿음을 가졌던 거다. 그러나 영화는 나의 ‘사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얄팍한지를 깨닫게 했다. 덤덤하면 피해자답지 않고 친절하면 가해자 같지 않다는 건 폭력적 고정관념이지 않은가.
가해 사실을 인정하는 성원의 "어."라는 대답과 동시에 거대한 싱크홀이 성원이 서 있던 자리에 생겨 성원은 그대로 밑으로 추락한다. 급작스러운 엔딩이지만, 가해자에게 어떠한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는,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가장 단호한 연출이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드는 결말이었다.
이옥섭 감독은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청년 문제를 너무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다뤄달라는 제안을 받아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됐다고 한다. 감독은 낭만적 사랑 관계 속 상대방으로부터 위협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이 일상의 불안을 윤영이라는 주인공에게 자연스레 투영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윤영이라는 인물에 많은 청년이 공감했다는 사실은 흥행기록을 통해 증명되기도 했다. 아무렴, 윤영처럼 지금도 누군가는 일상적인 불안을 감내하며 관계를 유지한다는 게 많은 ‘낭만적 관계’의 이면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된 소재인 믿음과 불신을 여러 에피소드로 다루는 방식도 무겁지 않아 좋았는데, 감독의 유머 코드도 나와 퍽 잘 맞았고 누군가를 믿고 의심하며 다시 믿어보는 마음의 연속을 경험해본 나로서는 간간이 웃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영화 말미에 나온 대사는 긴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일이다
영화의 말마따나 관계에서 불신이라는 구덩이에 빠졌을 땐 의심과 불안을 키우지 말고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와야 한다. 진실을 직면하는 일은 쉽지 않고 불안한 상상을 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일이겠지만. 그래서 어쩌면 좀 더 용기가 필요한 우리들에게 청년 문제와 사람들의 보편적 고민을 재치있게 풀어나가는 영화 <메기>는 우리의 부푼 의심과 불안을 먼저 안 아프게 찔러주는 바늘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