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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과 영어

by 시월아이

아침부터 잔뜩 흐리더니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폰에 깔린 날씨 앱에는 종일 미세먼지 농도만 짙을 뿐, 비소식은 없었는데 먼지구름에 비구름이 뒤섞여 있었나 보다.

5교시까지 수업이 있는 날은 1시 50분에 마지막 수업이 끝난다. 1시 40분쯤 나는 일하던 노트북을 덮고 간단히 잠바만 걸치고 우산 2개를 챙겨서 아파트 맞은편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비는 아주 많이 오진 않았지만 미세먼지 농도가 안 좋은 날이라 흙비일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도 그냥 맞고 다니기엔 부담스러운 양이었다. 아침 등교 시 날씨를 확인하여 비가 올 것 같으면 우산을 챙겨 가라고 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에는 어쩔 수 없이 마중을 가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나가는 마중이 참 좋다.


딸아이 학교에 다다르자 먼저 와있던 다른 엄마들이 학교 건물 본관 쪽을 바라보며 자신의 아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기다리는 어른의 수가 열명도 채 되지 않는다. 나는 교문 한편으로 바짝 비켜서서 5교시 마치는 종이 울리길 기다렸다.


비가 오기 시작한 그 시간 즈음엔 교실 밖 창문으로 내리는 비를 보며 교실은 잠시 옹성거렸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것을 제일 먼저 알아챈 아이의 "비다, 비 온다" 한마디에 우산이 없는 아이들의 안타까운 탄식과 우산을 가져온 아이의 뿌듯함이 묻어나는 미소등이 뒤섞였을 테다. 그런 상황이 내게도 여러 번 있었지. 최대한 빠르게 밖으로 나온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두 손으로 이마에 지붕을 만들어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막으려 애쓰며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뛰지 않고 걸었던 기억이 난다.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바글바글 서 계시던 여느 아이들의 엄마와 할머니 사이를 비집고 천천히 그렇게 걸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는 가족만 없는 듯 정말 많은 부모와 조부모가 나와있었다. 언제나 그렇든 나는 익숙한 얼굴을 찾아보려 시도한 적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부터 언제나 일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마도 초연한 척, 태연한 척, 침착하게 빗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서운하지도 않았고 그 아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어렸지만 나의 의연함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이상하게도 매 학년 반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는 우리 반에서 공부도 잘하면서 밝은 성격의, 꽤 잘 사는 (적어도 그때의 우리 집보다는) 아이들이었다. 지역 신문사 편집국장을 맡고 있던 아버지를 둔 친구도 있었고, 우리 아빠가 다니시던 조선소에서 꽤 높은 직책의 사무직에 근무하는 아버지를 둔 친구도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현장직이셨다.) 그런 친구들이 사는 집은 대단지 아파트였다. 그 당시 우리 집은 2층 짜리 주택에 전세로 살고 있던 5 가구 중 한 가구였다. 친구들 집에는 차도 있었고 피아노도 있었고 수족관도 있었다. 그리고 직장에 나가지 않는 엄마가 있었다. 방과 후 친구 집에 놀러 가면 친구들 엄마들은 모두 나에게 친절했다. 먹을 간식도 넉넉하게 준비해 주셨다. 가끔은 그 엄마가 운전을 하는 차에 친구와 함께 타고 가까운 공원으로 놀러를 가기도 했다. 마치 한 가족처럼 말이다.

나는 한 번도 그 친구들의 집과 아버지의 직업의 부러운 적이 없었다. 아니 그렇게 믿어왔는지 모른다. 엄마가 일하지 않고 집에 계시다는 것은 부럽다기보다 신기했다. 그때 나는 그 엄마들이 하루종일 너무 심심할 것 같아 오히려 걱정이 되었다. 순진했을까, 순수했을까, 아니면 경제적인 개념조차 없는 무지렁이였을까.


그런 나에게도 내 부모의 부족함이 부끄러웠던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날도 역시 친구 엄마의 차를 타고 친구와 함께 근처 수변 공원으로 드라이브를 가고 있었다. 친구가 자신의 엄마에게 갑자기 창밖으로 보이는 사물들을 영어로 뭐라고 말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창문? 창문은 윈도"

"돌멩이는 스톤"

"길은 스트리트야"


열 개나 넘는 친구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하는 그 엄마를 보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초등학교 5학년, 아직 알파벳도 배우기 전이라 아예 그쪽 방면으로는 백지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선생님이 아닌 평범해 보이는 우리 엄마 또래의 아줌마가 영어를 저리도 잘한다는 것이 그 당시 나에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내 부모에게 영어와 관련된 질문을 해 본 적은 없었지만 만일 질문을 한다 하더라도 당연히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가정 형편으로 초등학교 졸업 후 줄곧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해야 했던 엄마.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나 귀하게 자란 탓에 어려운 형편에도 중학교는 졸업한 아빠의 학력은, 매년 학기 초 적어내야 했던 가정환경 조사서에 각각 중졸과 고졸로 자체 업그레이드해서 쓰면서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의연하려 애썼고 그렇게 그 시간들을 잘 지나쳐 왔었다. 하지만 그날 그 순간, 지금까지 내가 써 왔던 가정환경 조사서와 지금 부모님이 하고 계신 건설 현장과 공장의 막일 장면들이 겹쳐지면서 대졸이라는 그 친구 엄마의 막힘없이 나오는 영어 단어들은 나를 처음으로 초라하게 만들었다. 비 오는 날 마중을 나오지 못했어도, 공개수업도 참석을 못하셨어도, 더운 여름 여느 아이들처럼 아이스크림 한 번 돌리지 못했어도 애써 괜찮았던 나인데 말이다.


30년이 넘은 세월이 지나 첫 딸아이를 낳은 후 나는 4살 무렵부터 엄마표 영어 듣기 교육을 꾸준히 해왔다. 짧았지만 영국 어학연수 경험과 10년 간의 해외사업 경력은 내게 영어에 대한 자유로움까지는 아니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직접 가르쳐 줄 실력까지는 있었다.

꼭 이런 경험이 아니더라도 요즘은 대학을 나오지 않거나 영어교육을 받지 않은 부모들은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 때처럼 부모들끼리의 교육 격차가 크지 않다. 직업의 귀천이 상대적으로 많이 사라졌기에 부모의 직업이 아이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부모의 직업과 학력을 묻지 않는다.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중요시되고, 본인의 커리어를 위해 경제적인 형편과 상관없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경제활동을 하는 워킹맘들도 상당히 많다. 나 역시도 한 달 전만 해도 카페를 운영했었으니깐. 그러니 수많은 아이들이 하교 후 학원차에 올라타거나 부모님 중 한 분이 퇴근하기 전까지 돌봄 교실을 이용하거나 빈집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곤 한다. 비가 와도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오기 더 어려워진 것이다.


내 부모님 만큼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와 내 남편 역시도 우리 아이들에게 객관적인 지표로는 그다지 내세울만한 학력이나 재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 부모와는 다르게 아이에게 우산이 필요할 때 언제든 우산을 가지고 마중 나올 수 있는 부모의 자리에 있었다. 카페를 운영하면서도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날에는 가게 문을 닫고 아이를 데리러 간 적도 있었다.


지금의 내 나이, 지하에 있던 작은 옷 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던 그 시절 우리 엄마는 높은 창문밖으로 갑작스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비를 맞을 두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땠을까. 다 큰 딸의 마음이 시려 왔다.


어느새 5교시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고 5분 정도 지나자 본관 1층으로 내려온 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딸 역시 100m 도 더 떨어진 정문 앞 나를 금세 발견하고는 손을 흔든다. 나는 우산 두 개를 들고 좀 더 앞으로 뛰어갔다. 딸 앞으로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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