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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영업, 아부가 아니다.

by 시월아이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 대략 10년 동안 2곳의 직장에서 해외사업 일을 하였다. 두 회사 모두 IT제품을 개발, 제조하던 회사였고 내 역할은 우리 회사 제품을 해외 곳곳의 바이어들을 상대로 수주를 따내는 일이었다. 그 바이어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KT나 SK Telecom과 같은 통신사이거나 혹은 이마트나 홈플러스와 같은 대기업들이었다. 그들을 뚫어야 비로소 그 나라 최종 소비자에게 우리 물건이 팔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제품들은 처음에는 타깃 하는 시장의 특성과 최종 고객들의 니즈를 광범위한 자료를 통해 조사한 후 그 시장에 소위 먹힐 제품의 사양, 디자인, 가격대를 기획하여 제품을 개발한다. 이후 제품의 목업(실제 상품화될 최종 디자인과 가장 가까운 모양의 모형)이 나오고 본격적으로 바이어를 만나 미팅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변경을 통해 최종 제품을 생산, 출시하게 된다. 이렇게 최초로 기획되는 제품은 모든 부서가 으쌰으쌰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문제는 제품이 어느 한 국가 혹은 어떤 한 바이어의 최종 승인을 거쳐 생산이 완료된 후 동일 제품을 가지고 판로 확장을 위해 다른 국가나 다른 바이어에게 납품을 하기 위해서는 십중팔구 그들의 요구를 새롭게 수용해야 하는 경우를 맞게 된다. 거기다 국가마다 전자 기기 혹은 통신 기기에 받아야 하는 인증이 다르고, 인증을 받기 위한 필수 사양, 조건들이 다 다르기 때문에 때로는 엄청난 비용을 감안해 가며 일명, localization (현지화) 혹은 customization(고객의 요구사항에 따라 제품을 만들거나 변경하는 과정)을 해야 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영업인들은 회사 내부의 여러 부서들이 보내는 큰 파도를 타야 하는 입장에 놓인다.


"박 과장, 이거 지금 디자인 이렇게 바꾸면 금형 완전히 새로 해야 돼.
몇 대나 팔건대?"

"이대리, 여기 포트 하나 추가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그냥 이대로 팔면 안 돼? 이거 추가한다고 얼마나 더 팔 수 있는데?"


"김 부장님, 이거 하나 바꾸면 인증 새로 싹 다시 받아야 돼요.
이 지역은 그냥 포기하시죠?"


사양을 변경하는 단계에서는 기구,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품질, 디자인 부서의 원망과 의심을 들어야 하고 생산 단계에서는 생산, 품질 보증 부서의 확인과 요구사항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영업부는 타 부서 사람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회의가 거듭되고 의견이 팽팽해지면서 갈등이 깊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갈등이 깊어져 사이가 틀어지면 그 손해는 오롯이 영업부 직원이 질 수밖에 없다. 본인의 담당지역 판매 예상 실적이 아예 제로가 되거나 최소한 계획했던 일정이 한 두 달 밀리게 된다. 그러니 자존심 긁는 소리를 들어도 담당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팔 수 있는 물건조차 손에 넣지 못한다. 이쯤 되면 영업직원의 콧대 높은 진짜 고객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단 수출을 해야 하는 해외사업뿐만 아니라 B2B 영업을 하는 모든 업종의 회사에서 영업직원은 외부의 기업 고객과 내부의 타 부서 동료 고객을 함께 구슬리고 설득하고 빌고 모셔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아무리 많은 사전 오더를 받은 능력자라도 정해진 일정 안에 정해진 결과를 얻기 위한 내부 동료들을 협조가 없다면 단 한 대도 비행기에 실을 수 없기에 바이어만큼이나 타 부서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회사에 갓 입사했을 당시 나는 제조업의 기본적인 특성이나 영업의 기본은 물론이고 내가 팔 제품이 무엇인지 조차 모르는 그야말로 햇병아리였다. 그것뿐인가. 사회생활, 직장생활을 어떻게 하고 다른 동료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지조차 모르는, 강남대로 한복판에 내던져진 초보 운전자와도 같았다. 1년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끊임없이 질문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듣고 감사하다는 대답을 하는 것뿐이었다. 메모를 한 후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 보면 누가 적은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만 가득했으니 나는 모든 업무가 마치 영화 메이즈 러너의 주인공이 된 듯 미로를 빠져나오기 위한 과정 같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타 부서 동료들을 비롯한 연배 높으신 팀장님, 바쁘신 부서장님들도 그런 나를 귀찮아하지 않아 하셨다. 오히려 4,5년 차 이상 혹은 팀장 이상의 다른 영업 직원들에게는 언성을 높이고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들이 왜 화가 났는지, 왜 우리 영업직원들의 요청을 쉽게 들어주지 않는지 생각해 보았다. 설사 대표이사가 승인한 프로젝트임에도 불구하고 타 부서 사람들은 영업부 직원들의 요청을 호락호락하게 들어주지 않았으니,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는 첫 담당 국가로 인도네시아를 맡기 전까지 인도를 담당하고 있던 팀장님의 일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했다. 그때 그 팀장은 어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7년 전 귀국한 미국 현지 교포였다. 영어 실력을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을 거친 이력답게 IT에 대한 지식도 해박했다. 그런 그는 바이어와의 소통도 원활했지만 아는 것이 많다 보니 엔지니어들과의 소통도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럽다 못해 어떤 면에서는 그들을 압도하려고 했다. 담당 지역 바이어의 구미에 맞게 제품을 만들고 싶어 했고, 그런 욕심은 각 분야의 닳고 닳은 전문가들의 자존심을 긁는 언행도 적지 않았다.


"왜 안되죠? 00사 00 모델은 그게 다 되는데. 그렇게 안 하면 시장 진입 절대로 못합니다."

"알지, 아는데 지금 그걸 넣게 되면 전부 다 다시 해야 한다고. 우리 다 집에 못 가."

"집에 못 가도 하셔야죠. 그것만 되면 PO 준다는데"

"휴..."


또한 이미 생산이 완료되어 수출이 된 제품에 이상이 있을 때 팀장은 엔지니어들과 생산팀, 품질 보증팀을 달달 볶기 일쑤였다.


"그걸 못 찾아내고 승인 내시면 어떡합니까?"

"현지에 직원들 보내서 빨리 다 까대기(완제품을 다시 다 뜯는 작업) 하세요."


그런 상황들이 반복되다 보니, 제품을 기획하고 localization 하는 과정에서 타 부서 사람들은 수동적, 소극적, 미온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게 그 당시 내가 느낀 점이었다. 모든 일이 서툴고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더더욱 타 부서 직원들에게 항상 머리를 숙이고 목소리 톤을 부드럽게 하려 노력했다. 항상 물어보고 요청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자 작은 변경이나 추가 사항들도 요청하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나는 그 당시 다른 직원들이 타 부서에게 무언가를 요청할 때 쓰는 '공개식 선 요청' 방식을 따라가지 않았다. 이 방식은 대부분의 직원들이 타 부서의 요청이나 협조를 요구할 때 쓰는 방식으로, 이런 이런 것들이 필요하니 언제까지 이렇게 해주십시오라는 내용을 담당 직원을 수신자로 넣은 후, 대표이사 혹은 관련 부서의 가장 위에 있는 임원진은 물론,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다른 부서장 까지도 참조로 넣어 메일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대신에 나는 요구할 내용들을 최대한 정리하여 수첩에 정리한 후 담당 부서가 자리에 있고, 바쁘지 않은지 전화로 확인한 후 직접 자리로 찾아갔다. 그리고 충분히 실무적인 선에서 의견을 들은 후 그 부서의 부서장에게 다시 찾아가 현재 상황과 필요한 것들에 대해 의견을 구했다. 그 이후에 자리로 돌아와 내가 필요한 내용 혹은협조가 필요한 일들에 대해 공식 메일을 보냈다. 물론 참조도 우리 부서장, 해당 타 부서 부서장과 그와 밀접한 관련된 부서장까지 만이다. 그렇게 메일을 받은 담당자는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게 영업부의 요청사항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결과는 어떨까? 이메일에 대한 회신도 빠르게 오지만, 99% 긍정적인 회신일 수밖에 없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일정이 많이 소요되는 부분일지라도 부서장들 간의 협의와 임원진들의 승인을 빨리 얻어낼 수 있다. 일단 실무를 하는 담당자의 긍정적인 피드백만 얻는다면 결정의 권한이 있는 팀장, 부서장, 타부서장의 협조 요구는 물 흐르듯 흘러간다. 아무리 말단이라 하더라도 일단 한 국가를 담당하게 되면 그 국가의 PM (Project Manager)이 되므로 영업직원은 타 부서를 움직이는 파워를 어느 정도 갖게 된다. 이런 점을 이용해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타부서장을 바로 직대 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 중요한 점은 실수가 일어났을 때 대처하는 자세이다. 모든 개발과 localization 이 끝난 후 담당 영업직원은 생산의뢰서라는 것을 작성하여 전사(전체 부서, 전체 직원)에 배포하게 되어있었다. 그야말로 생산과 관련된 A부터 Z까지 모든 것이 들어있어야 했다. 최종 반영되는 SW버전, 패키지 사양, 제품 디자인과 인쇄 로고, 바코드 라벨 사양까지, 생산의뢰서 하나만 있으면 누구라도 생산 현장에서 이 제품의 생산을 진두지휘 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하게 작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실수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한 번은 생산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영어 매뉴얼에 오타가 발견되어 생산이 중지된 적이 있었다. 매뉴얼 검토는 영업직원인 내가 직접 하였는데, 최종 디자인팀에 내려진 버전이 아닌, 그 이전 버전으로 인쇄가 되어 공장에 입고된 것이다. 당장 선적 날짜는 정해져 있는데 생산 라인이 멈추면서 회사는 그야말로 비상이 걸렸다.


공장과 본사가 떨어져 있었기에, 인쇄되어 공장으로 입고된 매뉴얼을 행랑으로 받아서 뒤늦게 검토하다가 발견된 문제였다. 나는 우선 생산 관리팀장에게 전화 연락을 하여 생산을 중단시켰고, 곧바로 전사에 메일을 썼다. 그 메일의 본질은 "디자인팀의 실수, 혹은 구매팀의 실수, 혹은 품질관리팀의 실수"라는 말 대신 "영업 담당자인 저의 실수"를 시인하며 관련된 부서에 사과와 빠른 대처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최종 입고되는 여러 종류의 패키지들에 대한 최종 검토를 위해 응당 공장으로 내려가 확인하지 못한 나의 실수가 가장 컸다는 것이 내 진심이었고, 그로 인해 자신의 잘못이 아닐까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를 다른 많은 부서 직원들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의도였다. 최종적으로는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고 책임을 묻기 전에 일단 대처부터 신속하게 하길 원했던 이유가 가장 컸다.


한 번은 110v로 나가야 했던 아답터가 220v로 입고된 적도 있었다. 포장 계획은 바로 다음날부터였기에 나는 구매팀에 내가 직접 인터넷으로 110v 플러그를 직접 구매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은 후 (그 일도 부탁하지 않았다.) 구매하여 바이어의 승인을 받아 220v 충전 아답터와 함께 넣어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도 나는 구매팀을 탓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그 시간에 나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했고, 바이어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이해를 구했다. 나는 그 문제를 공식화하지도 않았고, 생산의뢰서만 변경하여 배포하였다.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때 구매팀장은 웃었고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불과 며칠 전 다른 영업직원과 눈을 흘기며 니 탓 내 탓하던 꽉 막힌 줄 알았던 그 팀장이 아니었다.


영업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나는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실수나 잘못에 대한 탓은 나에게 돌리고 공과 업적은 상대에게 돌릴수록 내가 더욱 빛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언젠가 내가 실수를 했을 때 나도 이해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누구나 실수는 한다. 그 실수를 공개적으로 까발리고 비난하고 끝까지 책임을 물으려 하면 나쁜 상황은 길어지기만 할 뿐,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이나 타인에게 피해를 준 심각한 일이 아니라면 함께 일하는 동료, 친구, 가족의 실수를 비난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관계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무안 주지 않기'를 철저히 직장 생활, 사회생활에서 실천을 했던 것 같다. 이때의 인간관계에 대한 나의 기본 가치가 이후 내가 가게를 운영하여 손님을 대하고,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대하는 것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완벽하진 않지만 적어도 그 가치를 계속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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