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여행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많이.

진정한 여행은 원래의 마음을 비우고 고요함을 담는 것.

by 시월아이

길고 긴 코로나의 터널을 빠져나온 후 전 세계 사람들은 그야말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디론가, 아니 어디든 떠나기 위해 혈안이 된 듯하다. 꼭 뉴스를 보지 않아도 그간 잠잠했던 여행 프로그램들이 물밀듯 제작, 방영되어 어느 채널을 틀어도 여행의 욕망을 자극받기 충분하다.

열 살인 딸아이는 학교 친구들이 벌써부터 중국이며 일본, 그리고 제주도를 다녀왔다며 올봄부터 놀러 가고 싶다고 징징거렸다. 마침 9년간 운영해 왔던 카페를 정리하고 5월부터는 완전한 백수의 길로 접어들게 되어 우리 부부는 한 달 전에 5월 제주도 여행을 계획했다. 비행기표를 끊고 숙소와 렌터카를 예약하고 여행 당일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딸아이는 제주도에 가서 기념품을 사겠다며 용돈을 열심히 모았고, 제주도 가서 맛있는 것 사 먹으라며 양쪽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받은 용돈까지 저축을 하지 않고 자기 지갑에 고이 모셔두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온 가족 첫 제주도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 부부는 결혼 후 9년 동안 한 번도 제주도를 가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며 이제부터라도 자주 여행을 가자 약속했다. 집에 도착하여 남편은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비용을 썼는지 계산을 해보자고 했다. 조금 귀찮았지만 나도 궁금했던 터라 결제 후 받은 문자 메시지를 정리해 가며 비용을 정산했더니 3박 4일 동안 150만 원 정도를 지출한 것으로 나왔다. 그나마 3박의 숙소를 남편 직장에서 지원되는 리조트에 묵을 수 있어서 1박당 1만 5천 원, 총 4만 5천 원밖에 들지 않았고 매일 아침은 간단하게 커피로 때우고 저녁 한 끼는 지인의 집에서, 또 한 끼는 선물 받은 패밀리 레스토랑 식사권으로 먹었기 때문에 항공권 60만 원을 빼더라도 평균적인 4인 여행 비용보다는 적게 쓴 것일 게다.

4인 가족 여행 경비 (일부)

만약 일반 숙소에 묵고 모든 식사를 식당에서 해결했다면 250만 원은 훨씬 웃도는 금액을 지출했을 것이다. 먹을 것, 입을 것 할 것 없이 모든 물가가 최근 1년 사이에 어마무시하게 올랐기 때문에 여행을 갈 수 있는 시기가 되었지만 비용으로 인해 여행이 무서워진 것도 사실이다.


과거, 해외사업부에서 10년 동안 근무하며 스페인, 프랑스, 독일, 미국, 터키, 중국 등 여러 나라로 출장을 다니던 시절, 타 부서 사람들은 항상 우리 부서를 부러워했다. 공짜로 해외로 출장 겸 여행을 간다며 말이다. 그 당시 나는 사실 출장을 참으로 싫어했다. 특히 전시회 참가를 위한 출장은 그야말로 지옥행이 따로 없었다. 전시회 참가를 위한 부스 예약부터 전시할 물품의 준비, 그리고 여정 자체의 준비 등 출장 한 달 전부터 시작되는 방대한 업무의 증가는 출장을 가는 현지에서 정점을 찍는다. 오전 9시부터 시작되어 오후 5시에 끝나는 전시 참가는 온종일 뾰족구두를 신고 서서 우리 회사 부스를 찾는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제품 소개를 하고, 전시 기간 중 하루는 경쟁사와 관련 기업들의 부스를 돌며 신규 제품과 트렌드를 조사해야 했다. 보통 3일에서 길게는 5일 정도 열리는 전시회가 끝나고 돌아오면 일주일 이내로 전시회 참가 결과 발표를 해야 했는데 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 작업 또한 엄청난 몸과 마음의 노동을 요하는 일이었다. 한 마디로 회사는 직원을 해외 먼 곳까지 큰돈 들여보내면서 절대 즐기고만 오길 그냥 두지 않는다. 돈을 쓴 만큼 결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어떤 목적의 출장이든 멀리 가면 멀리 갈수록 그 부담은 두 배 세 배로 돌아온다.


KakaoTalk_Photo_2023-05-18-11-47-51.jpeg 전시회 시작 전 준비로 분주한 부스

그러던 어느 해 8월, 기획부서에 있던 한 여직원이 열흘간의 장기 휴가를 내고 혼자 유럽여행을 간다고 했다. 예상 경비는 대략 두 달치 월급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결혼자금을 준비해야 할 나이에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여행을, 그것도 혼자 떠난다는 것이 무모해 보였다. 휴가를 앞둔 일주일 전, 함께 점심을 먹으며 여행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있던 그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 결혼하면 어차피 못 가잖아. 지금 아니면 절대 안 돼."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직장을 그만둔 지 어느덧 8년이 지났다. 첫 아이를 출산 후 1년 만에 복직을 하긴 했지만 6개월 만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내 발로 직장을 걸어 나왔다. 복직 한 달 만에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전시회 출장을 다녀온 게 나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되었고, 이후 8년 만에 다녀온 여행이 바로 이번 제주도여행인 것이다. 내 돈을 이렇게 많이 주고 떠나본 여행은 평생 처음이었다. 그것도 국내여행을 말이다.


스물여섯에 떠났던 영국 어학연수 중 다녀온 2주간의 유럽여행에서도 150만 원 이상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럴 돈이 없었다. 하지만 돈을 대신해 줄 튼튼한 다리와 체력, 그리고 낭만이 그때 나에겐 있었다. 새벽 4시에 떠나는 이지젯 항공을 이용하고, 공항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의 1박당 만원도 안 되는 유스호스텔을 이용하고, 하루 한 끼 정도는 대형마트에서 파는 몇 백 원짜리 비스킷으로 때우면 그걸로 족했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관광지는 당연히 거르고, 정부에서 운영하는 입장료 무료인 박물관, 미술관 등이나 자연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만 선택해도 하루 일정이 빡빡했다. 핸드폰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미리 짜인 일정 외에는 새로운 일정을 추가하거나 변경이 거의 불가능했다. 핸드폰을 사용하지 못하니 당연히 두 눈에 더 많은 걸 담을 수 있었다. 그때 나의 여행은 그랬다. 돈 대신 나의 체력과 기다림의 무료함으로 여행의 시간을 채웠다.


이제는 그야말로 여행은 돈이다. 물론 아직도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비행기 티켓과 최소한의 경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돈이 적은 만큼 그곳 여행지에서 유명하다는 탈 것, 볼 것, 먹을 것들을 경험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SNS와 인터넷에 정보가 넘쳐나는 지금,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 정보를 찾아보고도 돈 없이 가능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IMG_6659.jpeg 말 당근 주기 체험에도 당근 1개당 2,500원의 돈이 든다.

많이 쓴 만큼 여행 자체를 더 즐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항과 가깝거나 관광하기 좋은 도심 속 숙소는 더 비싸지만 어디든 이동하기 편리하다. 또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보다 택시나 렌터카를 이용하면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광'에 쓸 수 있다. 그곳의 전통적인 음식을 맛보고 전통 공연을 관람하는 것은 그 지역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대게 이런 것들은 더 비싸기 마련이다. 휴양지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숙소에 묵느냐에 따라 '휴양'의 퀄리티가 달라진다. 바다가 펼쳐진 전망에 디럭스 침대가 있고 조식이 근사하게 나오고 수영장이 딸린 숙소는 그 값어치를 한다. 노을 지는 바닷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쉼 없이 달려온 일상에 대한 노고를 위로해 주고 삶의 행복까지 선사해 줄 것이다. 아이들이 있다면 여러 체험에도 큰 비용이 든다. 여기에 사고 싶다는 물건 100가지 중 3가지만 사 준다고 해도 예상 비용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일종의 행복인 것이다.


친구 중 한 명은 다음 달에 일본 도쿄로 6박 7일 가족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항공비, 숙박비 등은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웠지만 산리오 퓨로랜드 (요즘 초등 여자아이들이 푹 빠져있는 헬로 키티 외 여러 캐릭터를 만든 회사에서 만든 일종의 캐릭터 랜드) 등 각종 놀이공원과 전시장등에서 쓸 비용은 예상이 안된다고 했다.


예전에는 돈보다는 시간이 없어 여행을 못 갔지만 이제 관건은 단연 돈이다. 자영업자가 아닌 이상 직장인들도 장기간의 휴가에 대한 조직 내 인식이 많이 바뀌어 휴가 내기가 한층 수월해졌고, 학생들도 체험학습을 목적으로 결석을 할 경우에도 1년에 일정 일수는 출석으로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에서는 국내 관광을 독려하며 여행비용을 일부 지원해 주기도 하는 등 국민들의 여행을 부추기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행을 가장 강요받는 사람은 바로 학생들이다. 누구에게 강요받느냐? 바로 같은 또래 친구들이다. 누구는 어딜 다녀오고 누구는 어딜 갈 예정이고, 다녀온 후 아이들의 늘어난 캐릭터 학용품과 기념품, 그리고 자랑하듯 나눠주는 현지에서 사 온 작은 초콜릿 등.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다녀온 아이는 그나마 낫다. 주말 가족 나들이 한 번 제대로 할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은 움츠려들 수밖에 없다. 무상 교육, 무상 급식 등 생존과 교육 등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국가가 해주는 듯 보이지만 웬일인지 아이들 간의 삶의 격차는 줄어드는 것 같지 않다. 의식주를 넘어 불균등한 여가활동들이 많은 아이들의 마음의 상처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수준의 여가생활을 영위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공산국가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나 아닌 다른 아이의 삶을 존중할 수 있는 가치관을 아이들에게 심어주는 것 만이라도 꼭 필요하다. 여행의 목적이 '자랑'이나 '행복 수준의 지표'가 아닌,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아주 짧은 삶'이라는 것을 말이다.


돈이 안 드는 여행은 없다. 각자의 형편에 맞는 여행만이 있을 뿐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의 가치는 그곳에서 얼마를 썼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무엇을 얼만만큼 버리고 왔느냐에 있다. 다녀온 후 떠들어대기보다(나도 여기에 떠들고는 있다.) 마음 속 고요함이 풍요로움으로 바뀌어 침묵 속에서도 평온과 다채로움을 가슴 벅차게 느낄 수 있는 여행이 많아지길 바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달콤한 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