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Jan 26. 2024

<나의 올드 오크>“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자를 찾아”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2001)는 끝내주는 성장영화, 훌륭한 노동자 영화, 그리고 연대에 대한 영화다. 배경은 대처 정부의 탄광 폐쇄 결정에 탄광 노조가 파업으로 맞선 1980년대 영국 북동부 탄광촌 더럼. 파업으로 생계가 막막한 빌리 아버지는 권투 글러브 대신 발레 슈즈를 선택한 막내아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배신자’라는 오명까지 감수하면서 파업에서 이탈해 갱도로 돌아간다. 이를 만류하는 큰아들과 승강이를 벌이다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가족을 위해 자존심마저 꺾은 아버지의 마음에 나도 꺼억꺼억 울었더랬다. 비난이 날아오리란 예상과 달리, 돌아온 건 마을 주민들이 빌리의 런던행 오디션 차비에 보태라고 십시일반 모은 돈. 그것은, 약자와 약자의 연대였다.     

그때 그 시절 빌리를 떠올린 건, ‘블루칼라의 시인’ 켄 로치가 들고나온 영화 <나의 올드 오크>를 보면서다. 켄 로치가 초대한 곳이 바로 빌리가 살던 폐광 마을 더럼. 한때 산업혁명의 중심지였지만 탄광 사업 붕괴와 함께 퇴락한 더럼의 오늘은 잿빛이다. 젊은이들은 떠났고, 남겨진 주민들 마음은 황폐해져 있다. <나의 올드 오크>는 그런 마을에 정부가 배치한 시리아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시작된다. 빈곤에 지친 주민 대다수는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다. 가뜩이나 바닥인 집값이 난민 유입으로 지하를 뚫으리란 판단, 미디어가 심어 놓은 난민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적대감을 부추긴다.     


편견 없이 난민에게 손을 내미는 주민도 있다. 오래된 펍 ‘올드 오크’를 운영하는 TJ가 그렇다. 그는 난민 야라와 가까워지며 우정을 쌓는데, 펍의 단골손님들은 그런 TJ가 탐탁지 않다. 급기야 펍에 난민을 들이는 TJ를 겁박한다. “(우리와 난민 중) 어느 편에 설지 정해!” 상상해 본다. ‘빌리 엘리어트’의 빌리가 그때 떠나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 TJ처럼 자랐다면, 그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켄 로치는 1980년대 대처리즘에서 확산한 신자유주의를 꾸준히 비판해 온 감독이다. 홈리스, 노동자, 실직자…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이 그의 영화 단골 주인공이다. <나의 올드 오크>가 각별해지는 건 이 지점이다. 그의 영화에서 줄곧 사회적 약자로 등장해 온 ‘노동자 계급’의 반대편에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난민’을 위치시킨 것이다. 이는 ‘악덕 자본가 vs 노조’라는 고전적 의미의 대결 구도보다 한층 복잡하다. 더 암울하다. 어쩌다가, 약자들끼리!     

기득권이 자기 손에 피를 안 묻히기 위해 사용하는 교묘한 교란술이 있다. 여론을 이용해 을과 을의 싸움 부추기기. 이 교란술의 가장 비극적 결말은 약자들이 ‘아프냐? 나는 더 아프다!’ 정신으로 서로에 대한 증오를 키우는 것이고, 이를 통해 기득권이 어부지리로 승자가 되는 것이다. 국내만 돌아봐도, 숱한 사례가 떠오른다. 켄 로치는 약자끼리의 싸움을 부추기는 체제를 비판한다. 동시에 TJ의 말을 빌려 시스템에 걸려든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삶이 힘들 때 우린 희생자를 찾아. 절대 위는 안 보고 아래만 보면서 우리보다 약자를 비난해. 언제나 그들을 탓해. 약자들의 얼굴에 낙인을 찍는 게 더 쉬우니까.”     


삶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덜 취약해지기 위해 택하는 방법이 서로의 가슴에 칼 꽂기라니, 얼마나 암담한가. 켄 로치는 비루해진 세상에서 연대의 추억을 떠올린다. DNA 속 어딘가 잠재돼 있는 그 정서를 생각한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과 난민이 거리를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건 펍에 걸려 있는 사진 한 장. 1980년대 파업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함께 밥을 먹는 사진과 그 아래 쓰인 문구다. ‘우리는 함께 먹을 때 더 단단해진다’. 그것은 발레리노를 꿈꾸는 가난한 소년을 위해 온 동네가 쌈짓돈을 풀던 시절의 흔적이기도 하다. <나의 올드 오크>는 켄 로치의 잠정 은퇴작이다. 긴 시간 약자의 편에서 세상을 바라봐 온 노감독 덕분에 그의 영화를 꾸준히 따라온 한 관객이 덜 나빠졌음을 고백한다.


(+세계일보에 쓴 '삶과문화' 칼럼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