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Apr 29. 2024

<챌린저스> 섹시하고, 야하고, 아찔하다

스포츠 경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라이벌전이다. 메시와 호날두가 붙었을 때,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같은 빙판에 들어설 때,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이 코트 위에서 테니스공을 주고받을 때,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은 도파민에 파묻힌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이들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팀을 위해, 최고의 자리를 위해 겨룬다.      


그런데 여기, 한 여자를 두고 관능의 테니스 랠리를 펼치는 선수들이 있다. 친구의 여자를 사랑했던 남자와 친구의 아내가 된 여자를 탐하는 남자, 전 남자친구와 현재 남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자. 아시다시피, 로맨스와 스포츠의 결합은 신선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 삼각관계는 빤하고, 라이벌전도 빤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결합시킨 <챌린저스>는 결코 빤하지 않다. '관능과 마술사'로 통하는 루카 구아다니노가 부여한 유려한 연출 덕분이다.      


테니스 챌린저 대회 결승전.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패트릭(조쉬 오코너)과 아트(마이크 파이스트)가 매섭게 공을 주고받고 있다. 손에 꼭 쥔 라켓에도, 받아치는 테니스공에도 심상치 않은 감정이 실려있음이 감지된다. 관중석 중간 지점엔 그런 두 남자를 아슬아슬하게 바라보는 타시(젠데이아)가 있다. 카메라가 경기장을 넓게 조망하자, 타시를 꼭짓점으로 삼각형 구도를 이루고 있는 세 사람의 위치가 드러난다. 이것은 이들 관계에 대한 은유. 도대체 세 사람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화는 이들의 얽히고설킨 관계사를 테니스 경기 사이사이에 교차하며 소환해 낸다.      


패트릭 vs 아트, 피프티(15):러브(0점)      

이들의 만남은 13년 전 US오픈 주니어 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상의 테니스 복식조이자 죽마고우인 패트릭과 아트는 테니스 천재 타시에게 운명처럼 동시에 반한다. 그런 두 남자를 두고 저울질하는 타시. 처음 큐피트의 화살은 패트릭을 향했다. 경기에서 아트를 꺾은 보상으로, 타시로부터 전화번호를 받은 패트릭은 그녀와 연인 사이가 된다. 그러나 두 사람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간섭과 통제에 질색하는 자유분방한 패트릭의 기질과 테니스를 향한 타시의 욕망이 충돌한 것이다. 마침 패트릭과 다툰 날, 타시가 부상으로 선수 생명을 잃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다.      


패트릭 vs 아트, 스코어 역전      


패트릭과 타시의 이별은 아트에겐 기회다. 절친인 패트릭과 절교하면서까지 타시 곁을 지킨 아트는 그녀의 남편이 된다. 큐피트의 화살이 아트에게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패트릭이 삼류 선수로 전락하는 동안, 아트는 타시의 코칭을 받으며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로 성장한다. 일도 사랑도 아트의 승리로 끝나는 듯 보였던 승부는, 그러나 슬럼프에 빠진 남편의 기운을 북돋고자 챌린저급 대회 출전을 독려한 타시의 선택으로 인해 변곡점을 맞는다. 이 대회에 패트릭도 출전할 줄이야. 게다가, 결승전에서 만날 줄이야.      


패트릭 vs 아트, 매치포인트      

자, 이제 요기 베라의 그 유명한 명언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가 이들 관계에 다시 파고든다. 슬럼프 극복을 위해 대회에 출전한 아트에게도, 상금을 타기 위해 참가한 패트릭에게도 또 하나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타시가 지켜보는 앞에서 지지 않는 것. 최종 승자가 되는 것. 그렇게 물러서기 힘든 매치포인트가 펼쳐진다.      

영화는 챌린저 대회 결승전과 이들 세 사람의 과거를 리드미컬하게 리시브하며 욕망과 소유욕, 시기와 질투, 후회와 이끌림 같은 인간의 내밀한 감정을 관능적으로 길어 올린다. 인물들의 숨은 관계가 미스터리처럼 하나둘 벗겨지는 덕분에 경기가 진행될수록 승부에 긴장감이 실린다. 이들 삼각관계가 만들어내는 에로틱 수치 역시 갈수록 뜨거워진다. 코트 위에서 득점과 실점의 기로에 놓인 테니스공처럼, 아트와 패트릭은 타시라는 매트 위에서 서로의 능력을 어필하고 견제한다.       


인물들의 솜털과 땀방울 하나까지 감각적으로 담아낸 카메라 앵글과 역동적인 무빙, 캐릭터 감정과 농밀하게 호흡하는 기막힌 음악 선곡, 유미적인 조명과 영상, 사랑을 쟁취하려는 '도전자들(Challengers)'의 탐미적인 육체…놀랍게도, 이 영화에서 이 모든 건 관능에 복무한다. 단순히 사전적 의미로서의 관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챌린저스>에서 점점 달궈지는 테니스 경기는 그러니까, 오르가슴으로 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승패 여부를 훌쩍 뛰어넘는, 모두의 오르가슴. 이토록 섹시하고 아찔한 경기를 보면서, "욕망과 통제의 역학관계가 테니스라는 스포츠의 아름다움과 몸놀림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멋진 기회였다"고 전한 감독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스포츠 경기는 변수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챌린저스> 역시 그렇다. 세 사람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건 분명 타시지만, 변수는 다른 곳에 있다. 아트와 패트릭 사이에 스며있는 우정을 넘어선 끈끈한 어떤 감정들이다. 공기처럼 존재해 몰랐을 뿐, 그들 사이에 숨어있던 서로를 향한 감각이 테니스를 매개로 되살아난다. 누군가 그 속에서 퀴어적 뉘앙스를 느낀다 해도 틀리지 않다. 거칠게 말하면 이 영화는 코트 밖에 있는 한 여자의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달려 나가던 도전자들이, '테니스는 관계'라는 코트 안의 명제를 깨닫고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제작자로도 참여한 젠데이아는 이 영화에서 자칫 미운털이 박힐 수 있는 타시의 욕망에 설득력을 부여하며 인물이 태생적으로 지닐 수 있는 상투성을 제거한다. 타시를 추동하는 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테니스를 향한 욕망이며, 승부욕이다. 야생마 같은 매력을 흩뿌린 조쉬 오코너와 부드러움 속에 강한 근성을 숨긴 마이크 파이스트의 매력도 상당하다. 관객은 타시만큼이나 두 사람의 매력을 저울질하며 영화를 따라가게 될 텐데, (구아다니노 감독의 페르소나인) 티모시 샬라메와 (젠데이아 남자친구) 톰 홀랜드가 양분하고 있는 할리우드 젊은 배우 판을 조금 더 넓히는 대안으로도 두 배우는 손색없어 보인다.      

그러나 <챌린저스>는 누가 뭐래도 루카 구아다니노의 작품이다. <아이 엠 러브>(2009), <비거 스플래쉬>(2015),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본즈 앤 올>(2022) 등이 증명했듯, 인간의 욕망은 구아다니노가 가장 잘 다루는 전공 분야다. 여름을 닮은 찬란한 영상과 감정의 결을 감각적으로 포착해 내는 데도 능한 감독은 스포츠를 소재로 한 이번 영화에도 자신의 인장을 강하게 박아낸다. 동시에 자신의 장르 커리어가 얼마나 다양한가도 증명해 낸다. 아무래도 장르의 그랜드슬램을 노리는 듯하다. 참고로 이 영화의 엔딩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구아다니노의 2018년 작품)의 엔딩을 위협할 정도로 섹시하다. 물론 다른 종류의 섹시함. 확인하시길.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