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이 모이면 음반 가게로 달려갔다. 음악 저장 매체가 LP·카세트테이프 같은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내가 선호했던 건 카세트테이프다.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가수의 카세트테이프를 고르며 ‘뽀대’ 나는 LP를 욕망하곤 했지만, 카세트테이프로도 부클릿과 아트워크를 즐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종종 처음 보는 낯선 뮤지션의 앨범을 구매하기도 했는데, ‘백이면 백’ 앨범 커버에 호기심이 발동한 경우였다. 매력적인 앨범 커버는 형체가 없는 사운드를 감각하게 했다. 음악이 전하는 감동을 확장시켜 주기도 했다. 음악은 내게 ‘듣는 것’인 동시에 ‘보는 것’이었고, 그 자체로 수집 아이템이었던 셈이다. 스트리밍 썸네일로만 음악을 접한 이들은 무슨 말인가 싶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 등장하는 ‘끝내주는 노래 모음집’처럼, 나만의 믹스테이프를 만들기도 했다. 공테이프를 플레이어에 장전한 후, 라디오에서 원하는 곡이 흘러나올 때 재빨리 녹음 버튼을 누르는 게 기본 기술. DJ멘트와 CM이 섞이지 않게 녹음하는 건 고급 기술이었다. 그렇게 채워진 플레이리스트는 지금으로 치면 ‘즐겨찾기 목록’과 같은 것이었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믹스테이프를 ‘고백용’으로 사용했듯, 나 또한 노래로 마음을 전하곤 했다. 그럴 땐 케이스 커버에도 공을 들였는데, 잡지 과월호 사진을 오려가며 DIY 정신을 한껏 발휘했다. 그것은,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공들여 만든 세상에 하나뿐인 아트워크였다.
1960~80년대를 풍미한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의 유산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을 보면서 과거 만들었던 아트워크들을 떠올렸다. 영화는 힙노시스의 두 기둥인 오브리 파월과 스톰 소거슨의 인간 드라마와 파격적인 앨범 커버 디자인을 통해 1960~80년대 음악과 시대상을 꿰어낸다. 아시다시피, 그들이 활동한 1960년대엔 포토샵이 없었고, 인터넷이 없었다. 대신 그들에겐 천재적인 아이디어가 있었다. 놀라운 실행력이 있었으며,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내는 엄청난 근성도 있었다.
‘좋은 디자인은 항상 흥미를 불러일으킨다’라는 모토에 따라 힙노시스는 단 한 장의 이미지를 얻기 위해 사하라사막으로 축구공 60개를 옮기고, 런던 상공에 거대한 돼지 모양 풍선을 띄우는가 하면, 스턴트맨 몸에 수차례 불을 붙였다. 글자 하나 없이 음반과 하등 연관이 없는 젖소 한 마리만 이미지로 내세워 핑크 플로이드 앨범을 만드는 대범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의 ‘그레이티스트(Greatest)’ 앨범에 들어갈 이미지를 찍기 위해 35㎏ 무게의 조각상을 헬기에 태워 에베레스트에 실어 나른 무한(?) 도전은 또 어떤가. 관례를 깨려는 시도에서 태동한 ‘의미 없음’을 노린 힙노시스의 어떤 작업물은, 대중에 의해 스스로 의미를 입으며 예술의 본질에 대한 느낌표를 던지기도 했다.
이들이 이처럼 아트워크에 대담한 도전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60년대 대중음악과 앨범이 ‘상품’이 아닌 ‘예술’이라는 인식이 있어서였다. 음반 결정권이 ‘클라이언트(음반사)’가 아니라 ‘아티스트’에 있어서이기도 했다. 런던 스튜디오에서 소금을 쌓아 놓고 그 위에서 찍으면 되는데 굳이 큰돈 들여 에베레스트까지 갈 필요가 있었냐는 ‘그레이티스트’ 커버와 관련한 일각의 물음에 대한 (돈을 댄 의뢰인) 폴 매카트니의 대답이 이 모든 걸 압축한다. “근데, 그럼 너무 쉽잖아요.”
맞다. 대충 눈속임으로 찍을 수 있겠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다. 무엇보다 거기엔 ‘시간’이 결여돼 있다. 창작자가 작품 속으로 스며드는 시간, 작품과의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는 시간, 감상자가 작품 이면의 것을 캐치하고 음미할 시간이 말이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소비되고 빠르게 잊히는 시대에. 그리고 판매 수치 경쟁을 위해 앨범 초도 물량을 대량으로 찍어내고 밀어내는 상술의 시대에 오드리 파월이 전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완벽함을 향한 열망이 없었다면, 그런 종류의 자존심 싸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갖게 된 작품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일보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