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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y 17. 2024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독창성 없는 새 출발

1968년 스크린에 착륙한 프랭클린 J 샤프너 감독의 <혹성탈출>은 반박을 거부하는 수작이다. 인간이 원숭이의 지배를 받는다는 뒤집힌 관계 설정은 호모사피엔스 관객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겼다. 원숭이 혹성에 떨어진 후 지구로 귀환하려고 애쓰던 주인공(찰턴 헤스턴)이 원숭이 혹성이 바로 핵전쟁으로 파괴된 지구임을 알게 되는 결말은 객석에 충격을 넘어 경악을 선사했다. 당시는 핵전쟁 공포가 인류를 위협하던 시기였다. <혹성탈출>은 시대를 은유하며 영화사에 존재감을 깊이 새겼다.

      

1편의 엄청난 성공을 토대로 <혹성탈출>은 이후 수많은 속편과 TV 시리즈로 가지를 치며 인기 프랜차이즈로 거듭났다. 그러나 성공한 영화를 콘텐츠로 재생한다는 건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대다수 속편이 1968년작 아우라에서 탈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중에는 기발한 상상력으로 천재 소리를 듣던 팀 버튼도 있었다. 2001년 나온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팀 버튼 작품세계에 커다란 오점만 남겼을 뿐이다. 

     

팀 버튼마저 실패한 <혹성탈출> 속편 잔혹사를 끊어낸 건, 루퍼트 와이어트가 들고나온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이다. 루퍼트 와이어트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대신, 프리퀄 형식을 통해 '인간이 무슨 이유로 유인원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새롭게 제시했다. 그 중심에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역사 속 줄리어스 시저의 외침을 수혈받은 듯한 유인원 시저(앤디 서키스)가 있었다. <진화의 시작>은 인간이 아닌 원숭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는 점에서도 전작들과 차별화를 이뤘다. 이러한 흐름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2014), <혹성탈출: 종의 전쟁>(2017) 3부작으로 이어지며 오리지널 못지않은 성공을 일궈냈다. 특히 <종의 전쟁>에서 긴 여정을 뒤로하고 퇴장하는 시저의 모습은 장엄하고도 품위 넘치는 그 무엇이었다.  

    

작별을 고했던 시리즈가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라는 이름으로 7년 만에 돌아온다고 했을 때, '그럼 그렇지. 할리우드가 돈 되는 아이템을 그대로 둘 리 없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무슨 자신감으로 독이 든 성배를 마시려 할까'라는 호기심이 일었다. 새롭게 출발하는 시리즈 사령탑에 앉은 이는 <메이즈 러너>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웨스 볼이다. 웨스 볼은 과연 헛스윙을 한 팀 버튼의 길을 밟을 것인가, 예상을 깨고 역전 만루 홈런을 쳤던 루퍼트 와이어트의 길을 따를 것인가.      


<새로운 시대>는 시저가 사망한 후 몇 세대가 흐른 시점에서 출발한다. 시저는 사후, 불멸의 신화로 거듭났다. 이제 그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유인원들의 위대한 시조다. 그사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유인원은 과거 자신들이 인간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인간은 그들에게 지능 낮은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원숭이 세상이 된 셈이다.      

그 한가운데 시저의 존재를 모르고 자란 '독수리 부족' 소속의 청년 노아(오웬 티그)가 있다. 영화는 노아가 제국을 접수하는 야심가 프록시무스(케빈 두런드) 일당에게 끌려간 부족을 되찾기 위해 긴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주인공의 여정에는 인연이 따라붙기 마련. 그는 길에서 만난 오랑우탄 라카를 통해 '인간과 유인원의 공존'을 주장했던 시저의 존재를 알게 되고, 비밀스러운 인간 소녀 노바(프레이아 엘런)를 통해 잊힌 지구의 비밀에 다가간다.       


전형적인 영웅 서사이자, 성장담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전작인 <종의 전쟁>의 반복이기도 하다. <종의 전쟁>에서 수용소에 갇힌 유인원을 구출한 후 무리를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떠나는 시저는 구약성서의 '모세'와 다름없다. 이번 영화에서 노아 역시 모세와 비슷한 행보를 보인다. 집을 떠나 스승을 만나고 성장한다는 영웅 서사 자체가 가뜩이나 도식적으로 다가오는데, 여기에 전작의 이미지마저 반복하는 터라 수가 너무 빤히 읽힌다. 너무 안정한 출발 아니냐는 의문이 드는 이유다.   

   

이 영화에 시저는 등장하지 않지만, 가장 큰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건 시저다. 좋게 보면 영화가 시저의 유산을 잘 이어내고 있다는 뜻이고, 나쁘게 보면 시저 이상의 임팩트를 보여주는 캐릭터가 없다는 의미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일단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 노아에게는 시저가 지녔던 카리스마와 매력이 부족하다. 노아가 각성하는 과정의 빌드업이 부실한 까닭이고, 새로운 관계를 맺는 인물들과의 유대 역시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성기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 수수께끼 인간 소녀 노바 캐릭터는 마지막 순간까지 오리무중인데, 일부 밝혀진 비밀도 막상 큰 놀라움을 주진 못한다. 다음 시리즈를 위해 소녀의 서사를 아껴둔 것이라고 하기엔,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흐릿하다.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프록시무스의 설정은 흥미롭다. 유사 시저 흉내를 내는 그는 사이비 교주와 흡사하다. "뭉치면 (유인원은) 강하다"는 시저의 신념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권력 유지에 사용하는 그는 인류 문명이 지녔던 기술과 정보를 차지해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다. '지식이 권력'임을 간파하고 있는 그의 야욕은 '정보력이 곧 힘'인 오늘날의 시대를 반영한다. 잘만 살리면 시대와 호흡하는 악당이 될 기회. 그러나 아쉽다. 설정은 좋은데, 깊이감이 빠졌다. 영화는 프록시무스의 주장이 설득력을 입을 충분한 시간을 그에게 부여하지 않는다. 두툼해질 수 있는 악당 캐릭터가 그렇게 쉽게 소비된다.      

리부트 3부작이 1편 <진화의 시작>부터 관객의 주의를 확 채고 시작했던 것을 생각했을 때, 이번 <새로운 시작>은 빌드업만 주야장천 하다가, 볼 만하다 싶을 때 멈춰서는 인상이 강하다. 이건 최근 할리우드의 수많은 리부트 작품 1편이 빠지는 함정인데, <새로운 시대>는 리부트 3부작의 유산 중 이러한 패기는 계승하지 못했다.      


이 작품의 CG 기술은 흠잡을 데 없다. 리부트 3부작에서 놀라운 기술력을 선보였던 VFX 스튜디오 웨타FX가 더욱 섬세해진 기술력을 한껏 자랑한다. 다만 전작 <종의 전쟁>에서 이미 지금과 같은 완성된 기술력을 보였기에, 그때와 같은 시각적인 감흥이 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영화가 마지막에 노린 대홍수 이미지는 <아바타: 물의 길>이 3시간이나 묘기를 부리며 다 보여준 탓에, 놀랍게 다가오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시금 캐릭터와 서사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영화의 본질에 대해서 말이다. 리부트 3부작이 이어질 당시 영화계는 CG 캐릭터를 연기한 앤디 서키스를 오스카 후보에 올려야 한다고 열띤 논쟁을 펼친 바 있다. 앤디 서키스가 시저 내면의 변화를 심도 깊게 그려냈기 때문이고, 테크놀로지와 이야기가 내밀하게 호흡했기 때문이며, 관객이 그런 시저에게 감정 이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운 시대>를 보고 나서 노아의 연기에 대해 언급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퇴보해 버린 이야기가 새로운 출발의 발목을 잡는 모양새다.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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