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만든 영화 중 제일 웃기는 영화 같다. 이번에는 진입장벽이 낮고, 이상한 거 별로 없다.” 최근 나영석 PD의 유튜브 ‘채널십오야’에 출연한 박찬욱 감독이 ‘어쩔수가없다’에 대해 한 말이다. 영화를 확인해 본 결과, 박찬욱의 이 말은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다. 일단 그의 영화 중 가장 많은 (노골적인) 유머를 머금은 작품은 맞다. 그러나, 이상한 게 많다. 아주 많다. 인간의 부조리함을 포착해 온 박찬욱스러움이 영화의 유머를 기기묘묘한 방향으로 연신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웃겨주는 영화라는 표현만으로는 ‘어쩔수가없다’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우스꽝스럽지만 짠하고 잔혹하면서도 슬픈 영화’라고 말하는 게 더 옳아 보인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25년 동안 한 회사에 헌신해 온 유만수(이병헌). 제지 업계에선 나름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그에겐 자기 손으로 꾸민 아름다운 집이 있고, 예쁜 아내(손예진)와 사랑스러운 아들딸도 있다. 대한민국 가장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중산층의 삶이다. ‘아, 모든 걸 이뤘구나’ 싶다. 그러나 이뤘구나 하는 찰나, 모든 걸 잃는다. 회사가 외국 회사와 합병하면서 구조조정을 당했기 때문이다.
3개월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쉽지 않다. 주택담보대출 원리금 납부 독촉장이 날아오고, 딸아이 첼로 레슨비와 넷플릭스까지 끊어야 할 판이니 집 분위기는 풍전등화가 따로 없다. 마침 자신의 이력에 맞는 자리를 발견하지만 자리는 하나, 경쟁자는 넷이다. 공생이 불가능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수가 선택한 방법?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다. 경쟁자들을 죽여서 말이다.
문제는 평생 종잇밥 먹는 것만 생각해 온 사람이라 사람 죽이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다는 점이다. 심지가 약해서 심지어 죽이기로 한 상대들에게 연민까지 느낀다. 제 코가 석 자인데, 결정적인 순간 주저하거나 실수하거나 덜컹거리기 일쑤다. 연신 우당탕탕거리는 만수의 이러한 행보는 역설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얼토당토않은 계획을 은밀히 응원하게 만든다. 물론, 여기엔 도덕적으로 몰락해 가는 캐릭터가 얄미워 보이지 않도록 설득력을 입힌 이병헌의 공도 크다. 물 샐 틈 없이 구현된 미장센, 하나의 캐릭터로 기능하는 공간 디자인 등 ‘박찬욱의 것’으로 명명될 인장도 선명하다. 김우형 카메라 감독의 유려한 촬영도 언급하지 않기 힘들다.
베니스국제영화제 공개 당시 해외 언론은 ‘어쩔수가없다’에 대해 “봉준호의 ‘기생충’에 대한 박 감독의 응답처럼 보이는 블랙코미디”라고 평한 바 있다. 동의한다. 엄밀히 말해 ‘기생충’은 부잣집 지하실에 오랜 시간 몰래 은거해 온 가정부(이정은) 가족과 위장취업을 통해 새로 침투한 기택(송강호) 가족 간의 생존을 위한 경쟁 스토리였다. 그러니까 ‘을과 을’의 싸움이었다. ‘어쩔수가없다’ 역시 ‘악덕 자본가(갑) vs 노조(을)’라는 고전적 의미의 대결 구도에서 탈피, 약자들간의 경쟁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만수는 각자도생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거울 같기도 하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THE AX)’ 원작으로 한다. “시간이 지나도 관객들이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소설이란 생각”에 오랜 시간 영화화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박찬욱 감독의 발언처럼 ‘어쩔수가없다’는 실적 악화를 겪는 제지업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어느 업계에나 적용가능한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 원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찬욱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시대 흐름도 포착하고 풍자한다. ‘어쩔수가없다’를 보러 간 관객이 가슴에 돌 하나를 얹고 나오게 된다면, 만수가 그토록 어렵게 당도한 길 끝에서 마주하는 실체 때문이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한 현장 속을 홀로 걷게 된 만수는 그래서 행복할까. 이 물음을 확인하려면 어쩔 수가 있나. 극장에서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국제신문'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