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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an 18. 2022

구찌엔 왜 구찌가 없나…<하우스 오브 구찌>

새해에도 ‘오픈런(Open Run)’ 행진 소식이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명품을 손에 넣기 위해 추운 새벽부터 백화점 앞에 긴 줄을 늘어선 사람들. 무엇이 명품을 향한 소유욕을 부추기는가. 단순히 최고급 재료로 만들어진 값비싼 제품이라서?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명품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거치며 쌓인 ‘브랜드 가치’다. 


이태리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으며 시작된 ‘메이드 인 이탈리아(Made in Italy)’ 브랜드 ‘구찌(Gucci)’의 가치도 그렇게 시간과 함께 쌓였다. 다이애나비(妃)를 비롯, 그레이스 켈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수많은 셀럽의 사랑을 받은 패션 아이콘으로. 더블 G 로고와 초록·빨강·초록 삼색 스트라이프 하면 자동연상되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러나 패션계에서 인정받는 지위의 상징을 획득하기까지 부침도 적지 않았다. 창립자의 이름을 내걸고 가족경영을 시작한 구찌에, 진짜 구찌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영화보다 영화같은, 구찌 가문 역사


구찌 가문 역사는 어느 세대를 떼어놓고 봐도 영화적으로 매혹적이다. 구찌 창업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의 인생부터 그러하다. 런던 사보이 호텔 벨보이로 일하며 상류층 문화를 어깨 너머로 탐색한 구찌오 구찌는 1921년 고향 피렌체로 돌아와 고급 가죽용품점을 열었다. 품질 보증을 위해 디자이너 이름을 새겨 판매한 것이 브랜드 상품의 원조. 재갈 모양의 홀스빗(Horesbit) 장식이 당시 귀족층 사이에서 사랑받은 것이 구찌 성공 신화의 서막이다. 브랜드 구찌의 이러한 시작에 집중했다면 영화는 아마 ‘가난한 청년의 인생 역전’으로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구찌오 구찌에겐 주식과 재산을 상속받은 네 아들 알도(Aldo), 바스코(Vasco), 우고(Ugo), 로돌포(Rodolfo) 4형제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동거를 넓게 조망하는 영화도 충분히 만들어질 법하다. 제목은 ‘형제의 난’쯤이 될까. 구찌를 논하는 데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파산 위기의 구찌 사가를 심폐 소생시킨-톰 포드(Tom Ford)의 시선에서 구찌를 그려내는 것도 흥미로운 선택지일 테다.


그러나 구찌 사가에는 이 모든 걸 뛰어넘는 이야기가 있으니, 청부살인 사건이다. 1995년 구찌오 구찌의 손자 마우리찌오 구찌가 자신의 사무소 계단에서 총살 당했는데, 그 배후를 파헤쳐 보니 이혼한 아내가 있었더라는 막장미 물씬 풍기는 이야기 말이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될 정도로 자극적인 이 소재를 할리우드가 군침 흘리지 않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소재에 더해, 영화팬들의 기대치를 끌어올린 건 리들리 스콧이라는 이름이다. <블레이드 러너> <글래디에이터> <아메리칸 갱스터> 등을 영화사에 남긴 노장 감독 손에서 탄생한 구찌 가문 이야기는 과연 어떨까. 


이름이 권력인 남자, 그 이름이 탐난 여자


이름 자체가 명패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마우리찌오(아담 드라이버) 역시 그렇다. 여러 사람이 모인 파티장. 우연히 통성명을 하게 된 남자와 여자. 이름을 묻는 여자에게 남자가 답한다. “마우리찌오…구찌”. 그 순간 파트리치아(레이디 가가)의 얼굴에 묘한 섬광이 스친다. 그날의 짧은 만남이 아쉬운 여자는 남자 주위를 맴돈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은 그렇게 연인으로 두 사람을 묶는다. 사랑에 빠져 파트리치아 ‘만’ 보이는 마우리찌오와 달리, 남자의 아버지 로돌포 구찌(제레미 아이언스)의 눈엔 파트리치아 주변이 ‘모두’ 보인다. “그녀는 너와 결혼하고 싶은 게 아니라 구찌와 결혼하고 싶은 거야!!” 아버지의 반대에도 아들은 사랑을 선택한다. 그렇게 파트리치아는 ‘구찌’ 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다가올 비극의 시작이 된다. 회사 경영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구슬리고, 마우리찌오의 큰아버지이자 구찌 최고 경영자인 알도 구찌(알 파치노)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알도의 아들 파올로 구찌(자레드 레토)를 가족 이간질에 활용하며 파트리치아는 구찌 가문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넓히려 하다. 그리고 이는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듯했다. 적어도 마우리찌오가 회사의 최대 주주가 되기까지, 그가 아내의 행동에 회의를 품기 전까지는 그랬다. 마우리찌오의 각성(?)은 부부 관계를 갈라 놓고,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에 지분 모두를 매각하는 빌미를 제공함으로써 구찌에서 구찌 가문 사람을 모두 지워내는 결과를 낳는다.  


평이한 각색, 뜨거운 연기


<하우스 오브 구찌>는 사라 게이 포든의 논픽션 소설 ‘하우스 오브 구찌: 살인, 광기, 화려함, 그리고 탐욕의 충격적 스토리(The House of Gucci: A Sensational Story of Murder, Madness, Glamour and Greed)’를 바탕에 둔 작품이다. 영화는 이를 크게 3막 구조로 각색했는데, ‘리들리 스콧+구찌’ 조합이 불러일으키는 기대에 비하면 다소 뜨뜻미지근한 결과물이란 인상이 짙다. 평이한 각색물이랄까.


구찌 가문 몰락에 뒤엉킨 인물들의 복수와 욕망 후회와 질투 등의 심리를 날카롭고 집요하게 해부할 줄 알았으나, 리들리 스콧은 어쩐 일인지 팔짱은 낀 채 거리두기 하며 지켜보는 쪽을 선택했다. 아버지 알도를 향한 아들 파올로의 콤플렉스는 이 영화에서 마우리찌오-파트리치아의 서사만큼이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감정의 ‘세부 묘사’보다 ‘풍자’와 ‘조소’로 스케치되면서 감정 이입을 막아버리는 면이 있다. 인물들이 처한 딜레마와 관계성을 조금 더 진득하게 파헤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구찌 내부를 엿본다는 심리와 실존 인물을 찾는 재미 등이 더해져 꽤나 영화는 흥미롭다. 능숙한 완급조절 덕분에 긴 러닝타임의 압박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서 가장 보증할만한 지점은 배우들의 연기다. 알 파치노와 제레미 아이언스가 든든하게 극을 떠받치는 가운데, 아담 드라이버가 실망 없는 연기를 펼쳐내다.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챕터 27> <미스터 노바디> 등 작품마다 변화무쌍한 변화를 보여 온 자레드 레토의 안면 탈바꿈이 인상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본다면 자레드 레토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는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그러나 <하우스 오브 구찌>는 레이디 가가의 영화다. 무대 위에서 뿜어내던 가가의 아우라는 스크린 안에서도, 알 파치노 같은 대배우 앞에서도 주눅 드는 법이 없다. 이젠 완연한 배우의 얼굴!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얼굴이다. 


('미디어임팩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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