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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Feb 14. 2022

'서울체크인' 같은 길을 걸어간 선배가 있다는 건

#1

이효리: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어요? 언니는 위에 이런 선배가 없잖아요.”

엄정화: “몰라, 술 마셨어. (정)재형이 붙들고 울었지!”

이효리: “나 항상 언니가 생각나. 내가 올라가는 이 계단을 언니는 이미 올라갔겠구나.”


#2

이효리: “지금 후배들은 딱 너를 보면서 엄청 열심히 할 거야.”

보  아: “그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해요. 좋은 본보기로 계속 있어야 된다…라는 압박감?”

이효리: “그렇게 압박감 안 느껴도 (넌) 충분히 멋있어!”


여기 세 명의 여성이 있다. 이름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가 된 뮤지션들. 험난한 쇼비즈니스 세계에서 살아남아 자기만의 인장을 박은 사람들. 그리고 누군가의 롤모델로 호출되는 엄정화와 이효리와 보아가. 이들을 한 화면에서 보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김태호 PD가 티빙에서 선보인 파일럿 예능 <서울체크인>은 제주댁 9년 차 이효리가 서울 스케줄을 마친 후 어디서 무얼 하는지를 따라가는 관찰 예능이다. 스타의 일상을 보여주는 포맷의 프로그램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상황에서 김태호 PD까지 굳이 ‘관찰 예능’에 뛰어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던 게 사실. 그러나 의구심을 밀어내고 기대감이 차오른 건 이효리라는 이름 때문이다. 이효리가 누구인가. 이 분야를 키우고 이끌어 온 장본인 아닌가. 


Mnet <오프 더 레코드, 효리>(2008), 온스타일 <이효리의 소셜클럽 골든12>(2012), <이효리의 X언니>(2013), JTBC <효리네 민박>(2017), 카카오TV <페이스 아이디>(2020)가 증명해 보였듯, 이효리는 신비주의가 업계의 주요 전략으로 사용되던 아이돌 시절에도, 삶의 동반자와 제주도에 머무는 지금도 미디어 앞에서 늘 꾸밈없이 자신을 드러내 온 불세출의 스타다. 무대 위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하다가 리얼리티 예능으로 걸어 들어가 소탈함을 흩날리는 건 이효리가 오래전부터 일관되게 보여 온 행보. 이는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고 조용히 살고 싶지만 잊혀지고 싶지는 않다”고 솔직히 털어놓은 이효리가 톱스타의 지위를 잃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속박되지 않고 사랑받아 온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이효리가 예능 안에서 재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명하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효리의 진짜 놀라움은 방송사가 만들어 놓은 빤할 수 있는 설정 안에서, 그녀가 자신의 ‘직감’과 ‘유머’와 ‘소신’과 ‘관계 맺음’으로 프로그램의 의도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왔다는 것에 있다. <효리네 민박>이 단순히 민박집 주인과 투숙객들의 이야기에서 머물지 않고 이효리와 아르바이트(아이유-윤아)의 공감대로 확대된 것처럼, ‘싹쓰리’ 린다G로 활동하던 이효리가 걸그룹에 어울릴 곡을 들으면서 “나랑 정화 언니-제시-화사가 부르면 되겠다”라고 농담한 것이 ‘환불원정대’ 탄생으로 이어진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김태호 PD는 이런 이효리의 면모를 잘 꿰뚫고 있는 연출자이자, 이효리가 농담처럼 흘린 말을 캐치해 방송 아이템으로 현실화시키는 데 최고의 추진력을 보여줘 온 인물이다. <무한도전>과 <놀면 뭐하니?>를 통해 인간 이효리의 매력을 확인한 김태호 PD가 <서울체크인>을 통해 노리는 것이 단순히 ‘이효리의 서울 나들이’에 머물지 않으리란 예상은 그래서 어렵지 않다. 


기대한 대로 <서울체크인>은 제주댁이 된 이효리의 서울 일상을 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녀가 엄정화와 보아와 김완선과 화사를 브런치 모임에 불러들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뻗는다. “이번 댄스 가수 모임은 계획되지 않았던, (이효리의 제안으로 이뤄진) 즉흥적인 모임이었다”고 밝힌 김태호 PD의 말에서 ‘이효리의 기획자로서의 면모’가 여지없이 감지된다. 

사실, 동종 업계를 걸어 온 여성들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건 <효리네 민박>에서 이효리와 아이유-윤아의 만남을 통해 다뤄진 바 있다. 당시 이효리가 아이유에게 건넨, “박수칠 때 떠나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이라는 담담한 고백은 프로그램 안팎에서 화자 됐던 말. <서울체크인>은 김완선-엄정화-이효리-보아-화사로 이어지는 여성 댄스 가수 족보를 통해 <효리네 민박>에서 선보인 여자 가수들 유대의 확장을 시도한다. 일본 쇼케이스 무대를 망친 뒤 무대공포증이 생겼다는 보아, 그런 후배가 안쓰러워 눈물을 보이는 엄정화, 타인의 시선마저도 초월해 자유로워졌다는 김완선, 그런 선배의 모습에 위안을 얻는 이효리. 이들은 같은 길을 걸어 온 상대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되짚고, 공감하고, 힘을 얻는다. 


사실 우린 김완선이 마음의 자유를 얻기까지 겪은 부침에 대해, 엄정화가 느끼는 선배로서의 책임감에 대해, 당대의 아이콘으로 군림해온 이효리의 인생에 대해, 보아의 불안감에 대해 완벽히 이해할 수 없고 완전히 공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같은 필드에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한 이라면 다르다. 내가 걷는 길을 앞서 걸어간 존경하는 선배가 있다는 건. 그런 선배에게 조언을 구할 수 있다는 건. 반대로 내가 걸어 온 길을 열심히 뒤따르는 후배가 있다는 건. 그에게 위로를 전할 수 있다는 건. 모두 아름답고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이들 여성 아티스트들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서울체크인>을 보며 괜히 마음이 시큰해진 건, 이효리가 언급한 ‘(댄스 가수 출신 여가수들이 버스 타고 전국 투어하는)여가수 유랑단’이 보고 싶어진 건, 이들의 관계가 세상 많은 관계를 비추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선배, 혹은 그런 후배가 있다면 공감할 것이다. 김태호 PD와 이효리의 재회를 격하게 환영한다


('데일리임팩트'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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