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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Feb 22. 2022

<모럴센스> 이렇게 슴슴할 수가

살짝 속은 기분이다. BDSM(구속과 훈육,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적 성적 취향)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음지에 머물러 온 도전적인 소재였고, 표현 수위 제약이 덜 한 넷플릭스가 플랫폼이라는 점이 더해져서, <나인 하프 위크>(미키 루크, 킴 베이싱어 주연의 1986년 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세크리터리>(매기 질렌할, 제임스 스페이더 주연의 2003년 작) 류의 과감한 연출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확인해 보니 소재만 도발적인 뿐 알맹이는 익숙한 로코물이다. 흡사 비포장도로 달리는 오프로드(off-road) 레이싱에 출전해 놓고, 아스팔트를 달리는 주법을 사용한 느낌이랄까. 


할 말은 하는 똑 부러진 홍보팀 사원 정지우(서현)는 타 부서에서 온 대리 정지후(이준영)에게 호감을 느낀다. 비슷한 이름이 안긴 해프닝으로 지우는 지후의 성적 취향을 알게 되고, 자신의 비밀을 알고도 편견 없이 바라봐 주는 지우에게 지후는 ‘주인님’이 돼주기를 요청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3개월간 은밀한 플레이를 하기로 계약을 맺는데, 이 계약에 감정이 개입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파도를 탄다.  

솔깃한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고 시동을 건 <모럴센스>는 후반부로 갈수록 전형적인 상황에 관성적으로 손을 맞잡으며 스스로 평범해진다. 무엇보다 이야기를 빌드업해 나가는 플롯이 신선하지 못하고 무디다. 도발적인 소재를 꺼내놓고 정작 중요한 순간마다 에둘러 가는 제스처를 취하는 이 작품은 논란의 여지가 될만한 부분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여러 번 들킨다. 


BSDM 용어를 내레이션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설정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었을까. 그게 맞다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화를 교육용처럼 보이게 하는 반작용을 안기기도 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메시지 역시 그 자체로는 의미 있으나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이 계몽적이어서 투박하고 심심하다는 인상도 남긴다.


원작 웹툰에 대한 나의 정보력이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BDSM 소재에서 관객이 예상/기대하는 남녀의 행위 묘사와 그것이 자아내는 섹슈얼한 기운은 이 작품의 큰 관심사가 아닌 듯하다. 상대의 성적 취향을 존중하겠다는 합의 아래 은밀한 공간에서 감행하는 이들 성인들의 행위는 매혹적이거나 관능적이기는커녕 귀엽고 종종 민망해서 오그라든다. 채찍이나 개 목걸이, 밧줄 같은 소품 사용에 대한 아이디어도 1차원적이라 장르의 애매모호함을 강화시킨다. 에로틱에 힘을 실을 계획이 아니었다면, 발칙한 면모라도 조금 더 강화했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BDSM을 눈 요깃거리로 사용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다. 박현진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모럴센스>에 대해 “우리가 요구받는 정상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야기”가 되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 영화는 이 부분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지배와 복종’이라는 관계가 연상시키는 야릇한 부분보다 <모럴센스>가 중요하게 다루는 건 ‘신뢰와 믿음’이다. 사랑에서 중요한 건 세상이 만들어 놓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서로의 ‘믿음에 기반한 상호 교류’임을 영화는 보여준다.  


다만 타인의 시선에 안기는 편견에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는 영화라는 점을 감안할 때, 두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들의 캐릭터가 단편적이거나 악마적이라는 것은 이 영화의 큰 약점으로 느껴진다. 인사팀 징계 회의에 모인 인물들이나, 지우의 지인인 혜미(이엘)가 데이트 과정에서 만난 강압적인 파트너는 전개상 구색에 맞춰져 기계적인 발언만 할 뿐 별다른 특이점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러한 주변 캐릭터의 정형성은, 두 주인공이 우리 사회의 편견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냥 고리타분하고 나쁜 사람들과 싸울 뿐이라는 느낌을 안기게 한다. 

정상성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게 닿으려면, 지후와 지우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 다채롭게 다뤄지고, 그런 시선 속에서 두 인물이 겪는 심리가 조금 더 깊고 넓게 확보됐어야 했다. 이러한 세밀함이 부재하다 보니 <모럴센스>는 원하듯 원하지 않듯, 소재가 이야기를 위한 장치로 희생됐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럴센스>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이라면 서현의 이미지 전복이다. 이미 드라마 <시간> <사생활> 등을 통해 어느 정도의 이미지 변신을 보여줬고 연기력에서도 안정적인 면모를 보였던 게 사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 앞에는 보이지 않는 벽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모럴센스>가 그 벽을 많은 부분 허물어준다. 소녀시대의 막내로서 ‘바른 생활 소녀’ 느낌이 강했던 서현은 강단 있고 주체적인 <모럴센스> 캐릭터를 통해 연기 보폭을 넓힌다. 무엇보다, 다양한 영역에 도전할 준비가 돼 있음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충무로 안팎에서 서현을 바라보는 시선의 편견도 많은 부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미디어임팩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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