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Feb 27. 2022

<스물다섯 스물하나> 김태리-남주혁이 그려내는 그림체

그림체라는 게 있다. 순정만화 그림체라거나, 명랑만화 그림체 같은.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서 남주혁이 연기한 백이진은 흡사 순정만화 그림체의 의인화 같다. 갸름한 턱선에 우수에 젖은 눈빛. 어깨는 태평양인데 얼굴은 소년미 넘치는 반전이 선사하는 의외성의 매력. 여기에 다소 비극적인 캐릭터 서사가 가미돼 순정만화 속 주인공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태리가 연기한 나희도는 연신 명랑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그림체의 모형으로 극에 침투해 있다. 단순히 귀여운 처피뱅 헤어스타일이나 털털한 걸음걸이 같은 외형 때문만은 아니다. 김태리가 연기해내는 ‘빙구미’ 넘치는 에너지 때문에 그렇다. 예뻐 보이려 안간힘 쓰지 않는, 드문 태도의 소유자인 이 여배우는, ‘우당탕탕’ 의성어를 달고 사는 듯한 만화적 느낌이 중요한 자신의 캐릭터를 정말로 그렇게 보이게끔 연기해낸다. 축복받은 재능이고 훌륭한 자질이다. 


여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건, 두 인물의 그림체 자체는 아니다. 그건 이질적인 것 같은 분위기가 충돌하며 자아내는 시너지다. 순정만화 그림체와 명랑만화 그림체가 이렇게 잘 어울릴 일인가, 내내 감탄하며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게 된달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시대의 흔적을 강하게 담아낸 드라마다. 이때의 시대란, 한국 경제의 ‘국치일(國恥日)’로 기록된 1997년 IMF다. IMF가 우리 사회에 남긴 흔적은 깊고 넓다. 국가 경제 허리를 책임지던 대기업이 줄도산하고, 은행들이 쓰러지고, 중산층 가정이 몰락했던 사건.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고, 실업자가 쏟아지고, 자살률이 치솟았던 그때 그 시절, 많은 국민은 하루아침에 꿈을 빼앗겼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IMF라는 풍파로 인해 각자의 지반이 흔들리고 구석으로 내몰린 이들의 이야기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대학 입학 선물로 고가의 오픈카를 선물 받을 정도로 집안이 유복했던 백이진은 IMF로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면서 하루아침에 이산가족 신세로 지하 셋방살이를 하게 된, 소위 몰락한 왕가의 왕자님 같은 인물이다. 꿈이 우주에 있었지만 삶을 뒤흔든 거대한 사건을 겪으며 인생에서 변하지 않는 건 지구의 ‘중력’ 밖에 없음을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청춘은 매일매일이 버겁다.  


나희도 역시 IMF의 자장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다. IMF로 교내 펜싱부가 폐지되면서 꿈을 포기해야 할 상황에 처한 희도는 그러나 “너의 꿈을 빼앗은 건 시대”라는 선생님의 일갈 속에서도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려 움직인다. 이건 선천적 성격일까, 후천적 노력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펜싱을 시작했지만, 기량이 서서히 뒤처지며 펜싱 순위는 물론 세간의 관심에서도 멀어진 희도는 일찍이 인생의 ‘단짠단짠’을 맛본 자다. 일련의 과정에서 희도는 자신만의 좌절 극복법을 터득했다. 매일 진다고 매일이 비극일 수는 없음을. 웃고 나면 잊기 쉬워짐을. 잊어야 다음이 있음을. 

잘 알다시피 최정상에 올랐다가 떨어지는 실패를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가 인생을 터득하고 이를 통해 성장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실패를 대하는 자세다. 나희도에게 이진이 물드는 건 이 때문인지 모른다. 이진에게 나희도는 “옆에서 봐도 희극”인 세계이므로. 세상의 아픔에 씩씩하게 덤비며 “얻을 것에 대해” 생각하는 명량 소녀 나희도의 태도는 그렇게 생에 처음 겪는 고난 앞에서 “잃는 것만 생각해” 온 백이진을 각성시킨다. 그런 이진에게 나희도 역시 물든다. 엄마도 응원하지 않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원해 주는 존재이므로. 


상호 보완적인 나희도와 백이진의 관계가 특히나 빛났던 건 2화 후반부다. 아버지 빚을 독촉하러 온 채권자들에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죄송합니다. 대신 저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게요”라고 말한 이진의 손을 이끌고 학교 운동장 수돗가로 간 희도는 물놀이로 이진에게 미소를 선물해 준 후 말한다. “시대가 다 포기하게 만들었는데 어떻게 행복까지 포기해? 그런데 너는 이미 아저씨들한테 약속했으니까 이렇게 하자. 앞으로 나랑 놀 때만 그 아저씨들 몰래 행복해지는 거야.”

이진을 위한 말이지만, 이 말은 묘하게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에게도 일종의 안식처를 마련해 준다. 덕분엔 우린 IMF를 그려낸 이 드라마가 품은 아픔을 잊지 않으면서도, 두 사람이 만들어나가는 행복에 마음껏 미소 지을 수 있는 ‘그린라이트 존’을 얻는다. 


처음 나는 IMF를 배경으로 한 청량감 넘치는 청춘 드라마가 나온다고 했을 때, 그것이 과연 가능한가 살짝 의심했다. ‘IMF’와 ‘청량감’이라는 단어는 한 그릇에 담아낼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의심을 앞서 언급한 전혀 다른 두 그림체의 주인공들로 인해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러니까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캐릭터의 개성을 시대에 영리하게 접합시킴으로써, ‘비극과 희극’ ‘청춘 멜로와 시대성’ 모두를 놓치지 않는 드라마다. 그래서 앞으로 남은 이야기를 자꾸 “기대하게 만든다.”


('미디어 임팩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모럴센스> 이렇게 슴슴할 수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