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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y 08. 2022

<우리들의 블루스> 이병헌과 꽃무늬 몸빼

촉촉한 눈빛의 '동네 오빠'

이름만 들어도 ‘헉’ 소리 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길래 한국판 <러브 액츄얼리>를 만드나 했더니, 제주로 간 <전원일기>에 더 가깝다. 가족·친구·이웃으로 얽혀 있는 인물들이 매회 메인 자리를 바통 터치하며 돌아가는 구조 말이다. 여러 인물의 사연을 종횡무진 누비는 형식만큼이나, 자신이 메인인 에피소드가 아닐 땐 비켜서서 드라마의 풍경이 돼 주는 스타들을 지켜보는 건 <우리들의 블루스>를 즐기는 재미다. 내겐 이 드라마를 각별하게 지켜보게 하는 또 하나의 결정적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제주도 출신으로서 느끼는 호기심이다. 네이티브 입장에서 사투리 고증부터 해보자,라는 심사가 있었음도 부인하진 못하겠다.     


비단 사투리뿐이 아니다. 지역의 정서를 배우가 얼마나 품고 있는가도 살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고두심은 ‘디폴트값’이자 ‘넘사벽’이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고두심은 섬의 공기 자체를 온몸에 휘감고 들어앉아 있다. 고두심만 등장하면 마음의 평온해진다는 다수의 평은 괜한 게 아닐 테다. 그런 고두심을 논외로 하고 바라볼 때, 나의 주의를 끄는 인력의 상당량은 이병헌이 연기한 동석에게서 나온다. 뭐랄까. 리얼리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연기를 보여준달까. 단순히 있을법한 인물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 아니라, 캐릭터에 새겨진 삶을 드러내고 있는 게 리얼리즘이란 걸 보란 듯 증명해 내고 있어서 내내 놀랍다.      

제주도 토박이 만물상 동석은 트럭에서 산다. 트럭에서 먹고, 트럭에서 자고, 트럭에 몸을 실어 섬들을 오간다. 그의 주 고객은 할망과 할아방, 그리고 시장을 오가는 소시민들이다. 동석은 먼 길 이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 스뎅국자나 건전지 두통약 같은 세간살이를 가져다주고, 시장에선 좌판을 깔아 생활용품을 판다. 한 사람이 살아온 습성은 행동을 통해 전해지기 마련. 몸빼 바지 입고 엇박자 손뼉을 치며 호객행위 하는 동석의 외침이 찰지다. “골라! 골라! 골라!” 비닐봉지에 물건을 날렵하게 욱여넣는 그의 모습은 오일장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제주 삼춘(이웃 주민을 친근하게 부르는 방언)의 그것이다.     

 

다른 만물상에게 물건을 산 단골 어르신들에게 동석이 펄쩍 뛰는 모습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제주도에는 ‘괸당 문화’라고 해서 가까운 이웃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카르텔이 있다. 이 괸당 문화는 제주도민을 결집시키는 미덕으로 평가받지만, 반대로 외부인에겐 폐쇄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해녀들이 서울에서 온 영옥(한지민)을 미덥지 않게 여기는 건 이 괸당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마을 어르신들이 다른 만물상에게 물건을 샀다는 말에 동석이 잔뜩 ‘부애(화)’가 난 것도 이와 연관이 있다. 그는 하루 매상을 올리지 못해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차 끌엉(차 끌고), 배 탕(배 타고) 하루 십만 원 벌이가 안 돼도 여길 기어 와신디(왔는데)” 그 의리를 어르신들이 져버려서 서운한 것이다. 감정 표현이 투박해서, 솔직하게 내지르는 외에는 도리가 없는 사람의 내면을 동석은 생생하게 표현해낸다.      

이때 동석의 몸을 통해 발화되는 이병헌의 제주 방언이 상당하다.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그는 언제고 “영어를 말하는 것과 영어로 연기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방언이라고 다를까. 사투리를 구사하는 것과 사투리로 연기하는 건 질적으로 다르다. 게다가 제주도 사투리는 전국 8도에서 유일하게 ‘표준어 자막’이 요구되는 외계어 같은 면이 있다. 그런데 이병헌은 이 고난도 사투리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와중에 생활 밀착형 연기까지 한다. 지역색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에선 아무리 연기가 훌륭해도 언어에 사실감이 실리지 않으면 모든 게 거짓말처럼 보이곤 하는데, 이를 밀도 있게 소화해 낸 이병헌의 연기로 인해 동석은 한층 더 현실감을 입는다.     


우리 주변에 진짜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점에서 동석은 <해피투게더>의 서태풍, <그것만이 내 세상> 조하의 먼 친척뻘이다. 세기말 방영된 <해피투게더>에서 이병헌은 기존의 ‘열혈남아’ 이미지에 반하는, 백치미 줄줄 흐르는 2군 야구선수 태풍으로 분해 뭇 여성들로부터 “오빠 이런 사람이었요?”라는 놀라움을 내지르게 했다.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결핍은 있을지언정, 뭔가 특출한 재능이 있다거나 ‘포기를 모르는 정대만’ 같은 근성을 지니기 마련인데 태풍은 마지막 순간까지 평범한 동네 오빠의 모습으로 드라마를 질주했다. 한국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이토록 ‘멋’을 접어둔 건 당시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현실 밀착형 인물이라면 <그것만이 내 세상>의 조하도 만만치 않다. 잘나가던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이제는 뚜렷한 직업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동네 백수. 전단지 돌리며 사는 생활인을 표현하기 위해 “티셔츠 경계선 따라 새까맣게 팔을 태우는 데 신경썼다”는 배우의 세심함은 조하를 조금 더 현실에 착지해 있는 인물로 보이게 했다.      

엄연히 말해 배우 이병헌을 키운 8할은 촉촉한 눈빛으로 대변되는 서정성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의 배우 인생을 더욱 흥미롭게 매만지고 있는 것은 어깨에 힘 뺀 연기들이다. 카리스마를 배반하는 허술함을 앞세워, 이병헌만큼 희비극을 톱니바퀴처럼 조율해 내는 배우는 드물다. 그 연장선에서 생리현상을 주체할 수 없어 바지춤을 붙잡고 종종거리는 <광해>의 하선이 나왔고, 허겁지겁 삼킨 라면이 너무 뜨거워 퉤 뱉어내는 <내부자들>의 안상구가 나왔다. 자신의 흑역사로 회자되는 밈’마저도 광고에서 스스럼없이 패러디하는 이병헌을 보면, 아무리 망가져도 자신이 쌓아온 결이 훼손되지 않으리라 믿는 자의 자신감이 엿보이는데 이 자신감은 옳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기질이 서로의 개성을 할퀴기는커녕, 적재적소에 튀어나와 이병헌이 연기한 캐릭터를 더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니 말이다.      

이 재능은 억척스러운 제주 남자 동석에게도 침투해 있다. 동석은 마음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누이가 바다에 휩쓸려 죽던 날, 뱃사람인 아버지를 파도가 덮쳐서 앗아간 날, 아버지 친구에게 어머니(김혜자)가 재가하던 날, 동석의 마음은 여러 번 죽었다. 그런 제주도가 싫어 서울로 떠났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타향 생활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마음엔 또 하나의 구멍이 있다. 자신에게 두 번이나 상처를 준 선아(신민아)라는 기집애. 동석은 양육권 다툼에 지쳐 제주도로 내려온 선아를 길에서 우연히 본다. 7년 만의 재회다.


차 배터리 방전으로 길 한복판에서 도움을 청하는 선아를 모른 척 지나가지만, 동석은 끝까지 외면하지 못하고 차를 돌린다. 이때 동석이 보여주는 모습이 마음에 박힌다. 동석은 선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서도 그녀를 얼마나 원망해 왔는지 티 내려고 안간힘을 다한다. “너, 나 몰라? 아는데 인사도 안 하냐? 싸가지 하고는…” 퉁명스러워 보이려 하지만, 어쩔 수 있나. 본능은 그런 그를 그녀 앞으로 끌어당겨 차를 기어코 수리하게 만든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그리워하는 일. 그 어떤 장르 안에서도 멜로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줘 온 이병헌은 이번엔 몸빼 바지를 입고 이를 자연스럽게 이행해 낸다. 


(매거진 '1st Look'에 기고 중인 '캐럭터앤모먼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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