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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Dec 27. 2017

남녀불문 사랑받는 배우들에 대한 단상..하정우부터 김혜

스테디셀러 배우들

스타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스타로 긴 시간 머물러 있는 것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빠르게 광고모델을 교체해 버리는 냉혹한 쇼 비즈니스 세계에서 ‘스테디셀러’로 꾸준히 사랑받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세계에서 또 하나 어려운 것은 남녀 모두에게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다. ‘남자에게 인정받는 남자 배우’, ‘여자들이 더 좋아하는 여자 배우’ 이 영광 역시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남녀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오랜 시간 ‘스테디셀러’로 머물고 있는 배우들, 그들의 묘약은 무엇일까. 그들에 대한 짧은 단상이다.


1. 하정우, 느낌 있는 선수     

하정우가 2011년 출간한 에세이 제목은 <하정우, 느낌 있다>다. 그 제목, 참 ‘느낌 있게’ 잘 지었다 싶다. 하정우는 마초적인데 귀엽고, 진지한데 코믹하며, 이성적인 동시에 낭만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가운데 능청스럽다. 그러니까 하정우의 매력은 모순 형용이다. 한 가지 색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분위기들이 모여 하정우라는 느낌을 만들어내고, 대중은 그 매력 중 하나에 기어코 매료된다. 부러 과시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나는 하정우의 ‘자신감’은 남자들로 하여금 ‘진짜다’라는 느낌을 들게 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놓치지 않는 유들유들한 면모는 여성들에게 ‘섹시한 남자’란 인상을 준다. 물론 이러한 호감의 바탕에는 대중이 배우에게 응당 기대하는 ‘연기력’이 있다. 연쇄살인마(<추격자>), 조폭(<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 앵커(<더 테러 라이브>)…그의 연기가 희귀한 것은, 기존 장르영화에서 보아온 연기 패턴을 비껴간다는 것에 있다. ‘먹방 연기’가 이토록 화자 된 것 역시 이 배우의 매력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하정우는 나설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전체 영화 안에서 세밀하게 조율하는 전략가이기도 하다. <범죄와의 전쟁>(2011)의 최익현(최민식), <멋진 하루>(2008)의 김희수(전도연)가 더 도드라지게 보인 데에는, 한 걸음 물러서서 중심을 떠받친 하정우의 리액션이 있다. 멍석이 깔린 원톱 영화에서도 하정우는 사려 깊다. <더 테러 라이브>(2013) <터널>(2016)에서 하정우가 돋보이는 것은 결코 출연 분량이 많아서가 아니다. 내지르는 연기가 좋은 연기로 평가받기 쉬운 시대에, 하정우는 곳곳에 널린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오버’하지 않는다. 이건 선수의 연기다. 


대중이 하정우에게 보내는 호감의 또 하나는 무명시절 그가 보여준 선택들에 있을 것이다. 아버지 김용건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서기 위해 성(姓)을 바꾸고 활동한 이력은 ‘연예인 가족 예능’이 우후죽순 범람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자못 판타지적으로 다가오는 지점이 있다. 유명 감독의 작품을 통해 발견되기보다는, 신인 감독들(윤종빈-나홍진이 대표적)과의 작업을 통해 함께 성장하며 충무로에 또 하나의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그의 등장은 한국영화계에 하나의 징후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배우. 하정우는 이제 엄연한 충무로의 허리다. 그러고 보니 올여름 스크린이 허전했던 이유. 여름마다 등판했던 하정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없어 뭔가 허전했다.


2. 송강호, 신뢰의 아이콘     

영화 투자의 반은 배우에게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스타가 흥행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은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스타는 여전히 투자에서 중요한 요소이고 그런 점에서 송강호는 독보적이다. 아무리 어두운 소재의 영화라도, 송강호가 나오면 일단 믿고 봐야 하는 영화로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한마디로 송강호는 곧 ‘신뢰’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데뷔, <넘버.3>(1997)를 통해 충무로에 길이 남을 레전드 장면을 남기며 본격 등판한 송강호는 이제 한국영화의 능선을 관통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다. <괴물>(2006)에서 시작해 <변호인>(2013)을 지나 최근 <택시운전사>(2017)까지, ‘트리플 천만’ 배우로 등극한 것은 단순히 운이 아니다. 특히 <변호인>과 <택시운전사>에서 송강호가 차지하는 지분은 절대적이다. 송강호 없이 이들 영화가 성립될 수 있을까.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5.18이라는 역사의 무게가 큰 부담 없이 관객에게 다가간 것은 송강호라는 훌륭한 전달자 덕이다. 송강호는 연기를 통해 배우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증명하는 연기자라는 점에서 ‘배우들의 배우’다. 송강호 연기에도 두드러지는 패턴은 존재한다. 심지어 그는 사투리를 버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 왔다. 그럼에도 그가 연기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다르게 보인다.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저평가되는 시대지만, 적어도 송강호가 연기한 배역들 앞에서는 그 말이 믿고 싶어진다. 이 배우가 ‘괴물’인 이유. 연기력에 있어서만큼은 ‘넘버 1’인 이유다.


3. 정우성, 영원한 청춘의 표상     

20년 전 <비트> ‘민’의 등장과 함께 정우성은 반항의 아이콘이자 청춘의 표상으로 시간 안에 박제됐다. <비트>를 본 남자들은 추악한 세상에 굴복하지 않고 격렬히 저항하는 이 남자의 고독에 흠뻑 취하고 그것을 동경했다. 반면 <비트>를 본 여자들은 비극을 향해 돌진하는 남자의 슬픈 운명에 마음을 빼앗겼다. 동시에 어떤 순간에 정지화면 버튼을 눌러도 곧 그림이 되는 정우성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정우성은 손으로 쉽게 잡히지 않기에 잡아보고 싶은, 그러나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을 것을 알기에 환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다. 그러나 머물러 있을 줄 알았던 청춘은 흐른다. 한강 교각 어딘가에 영원히 잠든 민을 뒤로 하고, 정우성은 스크린 밖으로 걸어 나와 ‘민’의 못다 한 청춘을 살았다. 그리고 어느덧 40대 남자가 됐다. 눈여겨볼 것은 그 과정이다. 정우성은 찬란한 청춘의 시기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커다란 이미지에 격렬히 저항하는 시간을 지나, 세상과 보다 현명하게 부딪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최근의 행동반경을 보면 이 배우가 진짜 멋있는 것은 비너스상도 울고 갈 이목구비가 아니라, 섹시한 뇌주름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로서 소신을 밝히는데 두려워 않고,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제작에 뛰어들고, 난민 문제를 알리기 위해 수단 네팔 레바논 등으로 날아간다. 정우성은 그렇게 ‘청춘의 아이콘’에서 ‘시대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고 있다.


4. 전도연은 전도연이다     

수식어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 전도연은 전도연이다. 연기 하나로 모든 걸 증명해내는 배우, 이름 자체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하나의 브랜드인 배우. <접속>(1997)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지 10년이 되던 2007년, 전도연은 <밀양>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진짜 드라마는 그 이후다. ‘<밀양> 이상의 연기는 보여줄 수 없을 것’이라는 일각의 평가를 뒤로하고 전도연은 또 다른 연기 영역을 탐험했고, 늘 새로운 얼굴로 봉우리에 깃발을 꽂았다. 전도연은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긴장시킬 수 있는 드문 배우다.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한석규, 황정민, 이병헌, 하정우…그 어떤 작품에서도 전도연은 ‘누군가의 여자친구’이거나 ‘누군가의 동료’인 적이 없었다. 전도연은 늘 전도연이었다. 늘 자신의 캐릭터로 작품의 전면에 섰다. 어느 순간부터 전도연은 눈코입뿐 아니라 얼굴 근육 전체를 사용해 감정을 표현하는 듯 보인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그 나이 때 여배우들이 인위적으로 지우는, 입가에 살짝 그어진 주름은 전도연의 존재감과 아름다움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배우란 이런 것이다. 전도연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건, 동시대를 살아가는 기쁨 중 하나다.


5. 소지섭, 이것이 진정한 간지     

좋아하는 영화엔 노 개런티로 참여하고(<영화는 영화다> <사도>), “랩을 하는 건 내 발을 찍는 도끼♬♪”(‘So Ganzi’ 가사) 라고 ‘셀프 디스’ 하면서도 진중하게 힙합을 부른다. ‘패션테러리스트’라는 일각의 반응에도 불구 자신만의 패션 감각을 고집스럽게 밀어붙이다가, 입금 후엔 또 예술적인 수트핏으로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뽐낸다. ‘작품성과 개성이 뛰어나지만, 상업성이 없다는 이유’로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좋은 영화들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어 직접 수입도 한다. 그야말로, 마.이.웨.이. 소지섭이 발휘하는 대중적 매력의 요체는 어딘가에 얽매이지 않는 삶의 자세와 목표한 것을 밀어붙이는 추진력, 그리고 과묵함 사이사이에 녹아있는 진중함이다. 어디로 튈지 쉽게 잡히지 않는 소지섭은 그러나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타협을 모르는 배우다. 다만 기질상, 그 규격에만 갇혀 있을 수 없어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 그 사이의 간극이 소지섭을 추동하는 힘이라는 점이 일견 흥미롭다. 남녀 모두가 그를 이구동성 ‘간지’라 부르는 것은, 어깨에 짊어진 고민을 허투루 쓰지 않고 다양한 활동에너지로 치환해내는 힘 때문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간지, 이름하여 소간지.


6. 유해진, 의외성이 지닌 매력     

영화 <럭키>(2015)는 유해진의 첫 단독 주연작이었다. ‘명품 조연’으로 달려온 배우 유해진의 실험대. 영화는 전국 697만 관객을 동원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모두가 놀랐다. <럭키>의 흥행이 증명한 건, 대중이 유해진이라는 배우에 대해 지니고 있는 높은 ‘호감도’였다. 이견은 있겠으나 <럭키>는 만듦새가 그리 훌륭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자칫 과장되거나 외모 희화화로 빠질 수 있는 철 지난 웃음 포인트들이 유해진의 절제 있는 연기 안에서 힘을 얻었다. 많은 관객이 <럭키>를 찾은 건 ‘유해진 마법’이다. 마침 예능 <삼시세끼>를 통해 상승한 유해진을 향한 호기심이 <럭키>에겐 큰 행운으로 작용했다. 이젠 많이 알려진 부분이지만, 코미디 연기를 주로 해 온 유해진은 사실 정극에 능한 배우다. 실생활에서 보여주는 면모 또한 작품에서의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다. 설치미술가 취미이고 독서광이 배우. 인정하자. 그가 김혜수와 사진, 클래식 음악, 미술 등의 취미를 통해 가까워졌다는 의외성 역시 유해진에 대한 호기심을 달군 게 사실이다. 잘 나가는 조연들에게 주연을 맡을 기회는 드물게 주어진다. 다시 조연의 길을 가느냐, 주연을 계속 맡느냐의 갈림길. 유해진의 차기작은 <러브슬링>이다. 다시 한번 원톱 주연이다.


7. 유승호, 짐작보다 어른스러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영화 <집으로>(2002)에 몸을 싣는 순간, 유승호의 운명은 보다 시끌벅적한 곳으로 급물살을 탔다. “압도적으로 귀여워!” 외할머니댁에 맡겨진 상우를 연기한 9살 유승호는 그렇게 전국 400만 관객의 남동생이 됐다. 만년 남동생일 줄 알았던 유승호의 변화는 그러나 생각보다 빨리 감지됐다. 타인의 기회를 뺏을 수 없다며 대학 특례입학을 거부했을 때, 또래 친구들처럼 조용히 군대에 입대했을 때. 이지가부대의 악마 조교로 활동하는 모습이 공개됐을 때 대중은 ‘우리가 어떤 틀 안에 가둬뒀던’, ‘마냥 어리다고 생각했던’ 유승호를 빨리 놓아줘야 함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배우의 반전. 전역하는 날 부모님과 고양이 두 마리가 보고 싶다고 펑펑 눈물을 쏟으며 전국 누나 팬들은 물론 예비역들의 마음도 들었다 놨다 했다. 사실 전역 후 유승호의 작품 활동(영화 <조선마술사><봉이 김선달> 모두 흥행 참패)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유승호의 스타성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이건 좀 드문 경우다. 너무나 많은 ‘까방권’(까임방지권, 하나의 장점으로 다른 단점에 대한 비난을 면할 권리)을 얻은 덕일까. 유승호가 지닌 긍정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견고하다.


8. 김혜수, 멋지다 멋지다 멋지다!     

“섹시하다” 김혜수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다. 그런데 김혜수를 향하는 ‘섹시하다’라는 말은 다른 곳을 향하는 ‘섹시하다’ 와는 성질이 좀 다르다. 그 속에는 ‘멋있음’과 ‘카리스마’와 ‘건강함’이 옹골차게 녹아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섹시함은 ‘어떤 태도’다. 시상식에서 노출 의상을 선보여도, 대중이 그것을 음탕하게 바라보지 않는 것은 섹시함이 비단 몸매에 국한되지 않고 태도에서 우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김혜수는 ‘자신감이란 섹시함’이 ‘외적인 섹시함’을 누른 드문 경우다. 여성의 몸이 성적 대상으로 주로 소비되어 온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김혜수라는 피사체는 그 중심부로 돌진하면서 반기를 들어왔다. 여성들이 김혜수에게 자긍심을 느끼는 건 그래서다. 남성들이 그녀의 당당함을 인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김혜수의 ‘섹시한 태도’는 생활 전반에서도 발견된다. 헤어진 연인에게 응원을 보내는 모습은 하나의 사례일 뿐, 미혼모를 위한 다양한 활동과 번역본이 없는 책을 읽기 위해 개인적으로 번역을 맡기는 등의 일화가 SNS에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김혜수는 이제, 후배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다. 지난 5월 열린 백상예술대상에서 한 장이 화제가 된 바 있는데, 김혜수가 김고은 천우희 한예리 박보영 서현진 등 후배들을 일일이 안아주는 모습의 사진이었다. 선배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후배들과, 그런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선배. 그 멋진 광경을 본 후 지금까지도 드는 의문. 왜 대한민국 감독들과 제작자들이 이토록 멋진 조합을 가만히 두고 있는가. 여배우들만 나오는 영화는 안 된다고? 이건, 대박이라니까! 한국에서도 퓨리오사(<매드맥스>에서의 샤를리즈 테론)는 나올 수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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