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Dec 29. 2017

<1987>, 작지만 의미 있는 계란들의 질주


용감한 기획을, 곁눈질하지 않고 뚝심 있게, 그러나 사려 깊은 마음으로 밀어붙인 올해의 한국영화. 검사가 부검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기자가 받아쓰기만 하라는 지침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부검의가 공권력의 협박과 외유에 굴하지 않았다면, 교도관이 옥중서신을 외부로 실어 나르지 않았다면… 촘촘히 맞물린 톱니바퀴에서 하나라도 튕겨 나갔다면 우린 여전히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궤변이 유영하는 세상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서 시작된 분노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6월 항쟁으로 이어진 데에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는 낸 점화자들이 있기에 가능했다. 장준환 감독은 역사적 무게에 짓눌려 망설이지 않는다. 실존했던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아직 차갑게 식지 않은 역사의 현장을 스크린에 재생시킨다. 악을 대변하는 박처장(김윤석) 얼굴 위로 그 사람 ‘전두환’ 얼굴이 중첩되는 부분에서 영화는 이 비극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명명백백 수배하기도 한다. 시대의 공기를 밀도 있게 포섭한 김우형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관객을 그 시간으로 더 깊게 밀착시키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박종철로 시작해 이한열로 끝맺는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한명 한명이 작은 횃불이다. 계주하듯 바통을 이어받으며 거대한 바위에 기꺼이 몸을 날리는, 작지만 의미 있는 계란들의 질주. 역사를 바꾸는 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이라는 점에서, 영화 내내 2017년 광장에 모인 촛불이 동시 상영된다. 이 영화를 ‘1987’로 쓰고 ‘2017’로도 읽을 수 있는 이유. 영화는 섣불리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하지만 눈물이 흐른다면 그것을 빠르게 마르고 마는 옅은 농도의 눈물이 아니다. 다음 세대로 이어질 거대할 물줄기일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남녀불문 사랑받는 배우들에 대한 단상..하정우부터 김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