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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Aug 21. 2022

<태양은 없다><헌트>, 정우성-이정재의 '투 숏'

영원한 깐부

홍기: 넌 몇 년 생인데?

도철: 74.

홍기: 나보다 두 살 아래네. 원래 실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냥 편하게 형이라고 해. 불편한 거 있으면 그때그때 이야기하고. 알았지?

도철: (어이없다는 듯 피식)

홍기: 이 자식 봐라. 너 형님이 이야기하는 데 웃어?

     

이것은 <태양은 없다>(1999) 속 동갑내기 주인공 도철(정우성)과 홍기(이정재)의 첫 통성명. 훗날 ‘청담 부부’로 불리게 될 정우성-이정재 두 배우가 스크린에서 나눈 실제 첫 대화이기도 하다. 세기말에 당도한 <태양은 없다>는 <비트>(1997)로 청춘 아이콘 왕좌에 오른 정우성과 <젊은 남자>(1994) <모래시계>(1995)로 모던한 도시남의 대명사가 된 이정재 두 아름다운 피사체의 만남만으로도 화제의 중심에 선 작품이었다.    

  

압구정동 30억짜리 빌딩 주인이 되기 위해 사기행각도 불사하는 허세 가득한 흥신소 직원 홍기와 펀치드렁크(정신이 몽롱해지는 상태) 증세로 인해 그토록 원하는 링에서 자꾸 밀려나는 삼류 복서 도철. 성향도, 취향도, 옷 입는 스타일마저도 너무 다른 스물다섯 동갑내기 도철과 홍기에게도 교집합은 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다시 폼 나게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이라는 점이다. 참혹한 패배와 상처를 몸에 새기면서 세상을 배워나갈 수 있는 시기. 암울하고 비틀거리지만, 청춘이라는 이름만으로 아름다웠던 그들.      

<비트>를 통해 감각적인 영상미를 선보였던 김성수 감독은 정우성-이정재의 치명적인 외모를 다양한 테크닉에 활발하게 포개며 청춘의 방황하는 날들을 감각적으로 그려냈다. 세상에서 밀려난 청춘들의 절규를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했던 저속촬영, 화면에 리듬과 정서를 부여하며 그림처럼 이어지는 몽타주 신, 속도감 넘치게 쪼갠 편집… 무심하게 걷던 아스팔트마저 런웨이로 만들어버리는 정우성-이정재의 투 숏은 ‘이것이 영화인지 뮤직비디오인지’ 모를 기분 좋은 착시를 안기기 충분한 것이었다.      


반향은 컸다. 전국에서 주황색 하와이안 셔츠가 불티나게 팔렸고, 은갈치 양복 주가가 상승했으며, 거리 곳곳에서 서처스(Searchers)의 ‘러브 포션 넘버 나인(Love Potion No.9)’이 흘러나왔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의 영화를 보기 위해 신분을 위장하고 극장에 침투한 중고딩들은 또 얼마나 전국에 넘쳐났던가. 그때 그 시절, 10대~20대를 보낸 이들에게 <태양은 없다>는 ‘청춘의 교과서’ 같은 작품으로 각인되었다.      


영화 라스트 신. 삶의 밑바닥을 경험하고도, 옥상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내일의 희망을 이야기한 도철과 홍기의 우정이 이후 어떻게 됐을지 우린 알지 못한다. 그러나 태양 아래에서 뜨거운 한 철을 보낸 정우성-이정재 두 남자의 우정이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알고 있다. 단순한 친구 관계를 초월한 형태의 막역한 특급 우정을 두 사람은 수십 년째 유지해 오는 중이다. SNS 아이디마저 from(from_jjlee)과 to(tojws)로 연결된 자타공인 청담 부부로.      

20세기를 접수한 후 21세기에도 대중의 관심 한복판에 머무르며 잘생‘김’을 발산한 그들은 여러 일을 도모했다. 의류 회사를 함께 설립해 브랜드를 론칭하기도 했고, 식품 광고에 동반 출연해 전국 정원이들을 설레게 하기도 했으며, 매니지먼트회사 아티스트컴퍼니도 설립했다. 그러나 팬들이 정말로 보고 싶어 한 것. <태양은 없다> 이후 업데이트가 멈춘 영화 속 두 사람의 투 숏이었다. 대중의 욕망에 예민한 영화계가 이를 모를 리 있나.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하는 작품을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 시도들이 번번이 무산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기대에 대한 부담. 막중한 책임감. 무엇보다 잘해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장고를 거듭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올여름 극장가에 당도한 <헌트>는 기다림에 대한 23년 만의 응답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연출은 이정재. 이정재의 연출 데뷔작 주연을 절친 정우성이 맡았다는 사실은 영화 <헌트>를 더 영화적으로 보이게 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의 재회가 관객의 관심을 끄는 요소는 될 수는 있어도 평가는 또 다른 이야기. 관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정우성-이정재의 마음만 있을까. 이들의 재회가 지난 추억을 퇴색시키는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길 바라는 팬들의 마음도 그만큼 막강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헌트>는 기대를 뛰어넘는 완성도의 작품인 동시에 영화를 대하는 두 배우의 프로페셔널한 자세가 품격 높은 시너지를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시작부터 거침없다. 마주치자마자 서로를 쏘아보며 으르렁거리는 두 남자. 안기부 해외 팀 차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 팀을 이끄는 김정도(정우성)다. 영화는 출발과 동시에 우리가 익히 아는 ‘청담 부부’ 관계를 비틀어, 두 남자를 대립 항으로 세운다. 이 대립은 조직 내에 숨어든 스파이 ‘동림’ 색출 작전에 돌입하면서 더욱 거칠어진다. 내가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상대가 동림이어야 하는 상황. 두 사람을 서로를 사냥하기 위해 팽팽한 탐색전을 벌이는데, ‘용호상박’으로 매 신 극렬하게 부딪히는 투 숏은 23년의 갈증을 여러 차례 해갈시킨다.      


실제 역사를 영화적 상상력 안에서 저글링 한 이정재 감독의 야심은 상당하다. 캐릭터적으로도 그런데, 김정도와 박평호는 아마 정우성-이정재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입체적인 동시에 복잡한 인물들일 것이다. 두 캐릭터를 움직이는 것은 권력욕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이고, 가치관이고, 평화이며, 자유다. 23년 전 폼 나게 사는 게 꿈이고, 좋아하는 일 하면서 사는 게 인생의 낙이었던 두 청춘은 이제 신념에 대해 자문한다. 어린 시절 흠모했던, 혹은 롤모델로 삼았던 청춘스타들이 중년이 돼서도 한국 영화계를 견인하며 유의미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는 건 영화계 안팎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선배란 얼마나 귀한가.      

신인 감독 이정재가 잡아낸 배우 정우성은 또 어찌나 ‘간지’나는지. 이정재는 정우성을 어떻게 포착해야 그가 더 멋있어 보이는지를 간파하고 있다. 사랑하는 배우를 만난 감독의 애정 필터는 이토록 막강한 것이다. 수트를 입고 계단을 구르며 한 몸이 된 양 뒤엉키는 두 사람의 투 숏도 특별 언급하고 싶다. 영화 엔딩에 다다르면 이 싸움의 뉘앙스가 자못 다르게 읽히는데, 앞으로 두 배우를 논할 때 자주 호출될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연출이라는 새로운 길에 선 이정재처럼 정우성도 연출자로서 제작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돌파하는 중이다. 가지 않는 길에 도전하는 것이 청춘의 특권 중 하나라면, 이정재는 여전히 ‘젊은 남자’이고 정우성은 여전히 ‘청춘들의 우상’이다. 이들의 투 숏을 더 자주 보고 싶다. 그나저나 두 사람의 우정을 소재로 한 영화가 훗날 만들어진다면 가장 난항을 겪을 건 아마도...캐스팅이겠지? 누가 이 원본들이 지닌 오라를 감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1st Look 퍼스트룩' 매거진에 쓴 캐릭터앤모먼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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