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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y 16. 2023

<성난 사람들> 스티븐 연이 달려온 길

리 아이작 정(정이삭)의 영화 <미나리>(2021)에서 스티븐 연은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온 한국인 가족의 가장 제이콥을 연기했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 땅에 발을 디디긴 했지만, 장남 콤플렉스가 있는 제이콥은 10년 동안 병아리 감별사로 뼈 빠지게 일했음에도 손에 쥔 돈이 얼마 없다. 번 돈을 족족 고국 가족들에게 보낸 탓이다. 한국에 있는 어린 동생들이 어느 정도 크자, 드디어 부모 부양의 책임을 벗어던진 제이콥은 아내 모니카(한예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칸소주 시골 지역의 바퀴 달린 집으로 이주한다. “아이들도 자기 아버지가 한 번은 꿈을 이루는 걸 봐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그는 미개간지를 구입해 농사를 지을 심산이다.

그러나 농사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심장이 좋지 않은 아들을 외진 곳에서 살게 하는 게 걱정인 아내와의 다툼은 늘어가고, 아이들에게 강한 아버지가 되고 싶은 욕망은 현실 앞에서 번번이 길이 막힌다. 가족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독단적인 선택으로 가족을 위기에 몰아넣기도 하는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영화에서처럼 이민가정에서 자란 스티븐 연에게 <미나리>는 “문화‧언어적 차이 때문에 추상적으로 바라봤던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는 기회”였다. <미나리>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된 날, 가족과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던 그가 아버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을 쏟은 데에는 이런 역사가 있다. 알다시피, 스티븐 연은 <미나리>를 통해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는 순간도 경험했다.       

한국계 미국인 이성진 작가가 쓴 넷플릭스 드라마 <성난 사람들(비프)>에서 스티븐 연은 이민 2세대인 대니를 연기했다. ‘제이콥의 아이들이 자랐다면?’을 상상할 수 있는 설정. 미국 문화를 받아들이며 성장한 대니는 제이콥과 같은 이민 1세대와는 달리 현지에 완벽하게 동화된 인물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옥죄는 건, (여타의 이민자 사회를 그린 작품들이 자주 쓰는 인종차별이나 정체성 혼란 같은 게 아니라) 무의식에 자리한 동아시아적 가치다. 사기를 당해 쫓기듯 한국으로 떠난 부모님을 다시 모셔 와야 한다는 책임감, 하나뿐인 백수 동생 폴(영 마지노)에게 형으로서 존경받고 싶다는 욕망을 지닌 대니의 본체는 영락없는 K-장남의 그것이다.

그런 대니는 ‘로드레이지(Road Rage, 보복 운전)’를 계기로 엮인 중국계 미국인 에이미(앨리 웡)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혈전을 펼치면서, 평생 달고 다니던 가면을 벗고 자유로워지기 시작한다. 예상되는 전개를 박력 있게 비켜 가는 이 신박한 영화는, 분노라는 감정을 블랙 유머로 승화시키는 한편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며 묘한 해방감을 안긴다.      

<미나리>가 스티븐 연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계기였다면, 대니는 한인 2세로 미국에서 살아 온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주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대니처럼 이민자의 첫아들로 자라 주위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정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가 보는 세상의 방법들에 눌려 살고 있고,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다. 스스로를 인질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대니를 연기하는 것은 내가 젊었을 때 나의 거울로 스스로를 볼 수 없었던 기억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라고 밝혔다.     


<미나리>와 <성난 사람들>에는 몇 가지 큰 공통점이 있다. 한국계 감독들이 만든 미국 작품이라는 것. 한국계/한국 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는 것. 백인의 시선에서 아시안을 그리는 흔한 방식과 거리를 뒀다는 것. 무엇보다 백인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고유의 목소리를 가리고 냄새마저 가렸던 아시아인들이, 시선의 감옥에서 벗어나 우리 안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도 큰 변화이지만, 그런 작품에 현지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는 것도 의미 있는 변화다. 그 교집합에 스티븐 연이 있다.      


5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 미시건주 트로이시티로 이주한 스티븐 연은 대니가 그랬듯 한인교회를 다니며 성장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쉽도록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의사가 되길 원하는 부모의 바람과 달리 배우라는 길을 선택한 데에는 경계인으로서 느낀 외로움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타인의 삶에 잠입하는 연기 안에서 편안함을 느꼈다”는 발언이 이를 추측하게 한다. 그러나 백인 주류인 할리우드라는 피라미드에서 동양계 배우는 가장 밑바닥 피식자에 놓인 시대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이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기란, 그리고 그만의 개성과 정체성을 보여주기란 녹록지 않았다.      

세상이 규정해 놓은 편견과의 사투, 그런 편견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기 위한 사투는 배우로서 그가 피해 갈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사투를 미국 드라마 <워킹 데드>의 글렌 역을 맡아 성공적으로 치러낸다. 정의롭고 용감하며 사랑하는 여인 매기(로렌 코헨)를 지키기 위해 전사로 거듭난 글렌은 아시아계 미국 남자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난 캐릭터로 평가받았다. 특히나 동양인 남자와 백인 여자의 러브스토리는 당시로서는 생경하게 받아들여지기도 했는데, 주류 콘텐츠에서 섹스어필하는 아시아계 남자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했다. 피플지는 그런 스티븐 연에게 ‘가장 섹시한 남자(Sexy Man of the Week)’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긍정적인 평가 속에서도 스티븐 연은 여전히 동양인 배우로서, 넘지 못하는 벽이 있음을 느꼈다. “글렌은 항상 좋은 사람이어야 했고, 옳은 일만 해야 했다. 쓸모 있어야 했던 거다. 이런 역할을 위해 아시안계 미국인 캐릭터가 존재한다고 느꼈다.”라고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캐릭터에서 느끼는 결핍과 고민은 뜻밖에 한국 감독들과의 작업을 통해 전환기를 맞는다. 마침 넷플릭스 작품 <옥자>(2017)를 준비하던 봉준호 감독과 인연이 이어졌고, 이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으로도 연결됐다. 특히 <버닝>에서 연기한 벤은 교포도, 이방인도 아닌, 한국말을 구사하는 온전한 한국인이었다. “동양인 배우 연기를 관객이 어떻게 볼까를 늘 신경 썼다는” 스티븐 연은 “<버닝>을 찍으면서는 그런 상념에서 벗어나서 온전히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스티븐 연의 연기가 <미나리>에서 달라졌다고 느껴지는 건 착시가 아닐 것이다. <옥자>와 <버닝>을 통과하며 그의 연기 뿌리는 한층 단단해졌으니 말이다.     

 

이 과정에서 일취월장한 한국어 실력도 언급하지 않으면 아쉽다. 봉준호와의 작업에서 말맛을 슬쩍 경험하고, 국어 교사 출신인 이창동에게 강한 개인 트레이닝을 받고, 솔직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로 유명한 윤여정을 또 한 분의 일타 강사 뒀으니, 한국어 실력이 쭉쭉 느는 게 당연지사. 이런 한국어 코스는 사교육 1번지에 가도 찾기 힘들다. 때를 맞춰, 한국 관련 콘텐츠들이 세계 시장에서 세를 불리는 형세이니 스티븐 연으로서는 또 하나의 좋은 도구를 장착한 셈이다.      


이전에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정체성” 안에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외로움”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나 이를 뒤집으면, 이쪽에도 저쪽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되기도 할 테다. 그리고 그것은 ‘경계를 넘어선 다양한 연결’이 시도되고 있는 지금 시대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스티븐 연의 다음 정거장은 봉준호와 다시 만나는 <미키7>, 그리고 마블의 <썬더볼츠>다. 그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을지, 기대하며 지켜볼 일이다.      


('퍼스트룩'에 쓴 캐릭터앤모먼트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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