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kg 덩치의 삶 엿보기.
우리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은 주변 눈치를 덜 볼 거라고 생각한다. 마동석씨가 소심하게 주변을 곁눈질하는 걸 상상하기 어렵듯이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처음 만난 떡대 동급생은 우리 학년의 싸움짱이었다. 그 아이는 동급생들을 위협하기도 하고 선생님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유형이었다. 내가 초식동물이라면 그 아이는 육식동물 같았다.
그 뒤로도 육식동물 같은 애들은 많았다. 나는 대체로 걔네가 무서웠지만 가끔은 부럽기도 했다. 그 아이들에게는 남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와 권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나 같은 애들에게 피해를 줄지언정, 초식동물처럼 눈치도 많이 보고 착한 짓도 많이 하던 나로서는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행동들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팔굽혀펴기를 시작했고 중1 때는 작은 홈짐을 차렸다. 해가 갈수록 근육이 단단해지고 어깨가 넓어졌다. 초식동물에서 잡식동물 정도로 변했달까?
고등학교에 가서는 누가 봐도 운동한 것 같은 몸이 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초식스러웠다.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수치스러울 뿐인 노력도 몇 가지 했었다. 육식동물처럼 눈에 힘을 주기도 하고, 다른 학교 육식인들에게 어깨빵도 하고, "눈 깔어"라고 말해보기도 했다. 진짜 육식인이 된 거냐고 물어보진 말아라. 실제로 '맞짱'을 뜬 건 중학교 때 나를 괴롭히던 놈과의 대결 한 번뿐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싸움을 시작하고 몇 분이 지나니 분노가 사라져서 애를 먹었다. 나는 천성이 초식인임이 분명하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육식에 대한 선망은 많이 사라졌지만 덩치는 여전히 소중했다. 덩치는 남과 나를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주변 모두가 나를 덩치 큰 아이, 힘센 친구라고 여겼고 나도 그게 좋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운동하던 홈짐을 벗어나 헬스장도 등록했다. 친구들이 나를 '운동 중독'이라고 부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덩치는 매년 커졌다. 군대 가기 전에는 80kg였던 몸무게가 전역 후에는 90kg를 넘었고, 2024년인 지금은 110kg가 됐다. 그토록 꿈꾸던 '남들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덩치가 된 셈이다.
근데 이게 그렇지가 않더라. 마치 중고 사기 같더라. 상품 설명에는 분명히 덩치가 크면 눈치도 안 보고 자유로울 거라고 써있었는데 다 거짓말이더라.
내가 무슨 깡패, 양아치도 아니고 덩치만 믿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덩치나 힘이 권력이 되는 건 학창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직업을 탐색할 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 친구 이삿짐 나르는 거 도와줄 때나 요긴했다.
오히려 이상한 부작용만 몇 개 얻었다.
첫째는 덩치에 대한 집착이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따라 몸이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하루 종일 불편하다. 아무도 없는 옥상 바로 앞 계단에 가서 팔굽혀펴기를 해서 근육을 부풀리고 싶다. (대학생 때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심지어 장애인 화장실에 들어가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나온 적도 있다. (...) (반성하고 있어요...)
옷을 살 때도 덩치가 커 보이느냐가 핵심 기준이 된다. 특히 티셔츠는 가로로 스트라이프가 있는 티셔츠, 어깨가 넓어 보이는 머슬핏 티셔츠만 산다. 덩치를 키우느라 살이 쪄서 젖꼭지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재질이 두껍거나 그 부분을 가려줄 그림이 있는지도 눈여겨본다.
밥을 먹을 때도 꼭 과식을 한다. 적당히 먹으면 근육이 커지지 않을까 봐, 오히려 줄어들까 봐 걱정돼서다. 매일 많이 먹다 보니 위장도 늘어난다. 점점 더 많이 먹는다. 배도 나온다.
메뉴도 고기가 중심이 된다. 사실상 고기 중독이 맞다. 비계가 잔뜩 붙거나, 두꺼운 튀김이 붙은 고기도 '덩치에 좋다'는 마인드로 가리지 않고 먹는다. 최근에 건강검진을 해보니 고혈압 전 단계가 나왔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도 나를 보면 '잘 먹을 거'라고 기대한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 그렇다. 예를 들어 독서모임이 끝나고 식당에 가면 모두가 내 식사량에 대해 한 마디씩 추측을 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이 먹을지 기대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이건 착각일 수 있지만.) 그럴 땐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며 긴장도 하지만 원체 잘 먹는 편이라 곧잘 부응해 낸다.
나보다 덩치가 크거나 최소한 비슷한 사람과 한 공간에 있으면 왠지 신경이 쓰인다. 근육 없이 살만 찐 사람이거나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면 상관없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이면서 다부지게 덩치가 크다면 계속 의식하게 된다. 안 그러고 싶은데 마음이 저절로 그런다.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이 됐다. 식사량을 줄여도 운동에 지장이 없다는 걸 과학적으로 아는 데도 심리적인 이유 때문에 줄이지 못하는 거, 동물들을 평생 좁은 우리에 가뒀다가 죽이는 공장식 축산을 보면서 다시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몇 달이 지나면 다시 고기를 먹는 것, 건강을 해칠 정도로 살이 찌는 걸 알면서도 덩치 때문에 질 나쁜 식사를 하는 것, 여유증처럼 보일까 봐 어깨를 움츠리고 등을 구부리다 보니 상체가 경직되고 뻐근해지는 것, 혼자 소심하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 - 이런 것들 말이다. 덩치가 커져서 눈치도 안 보고 자유롭게 살게 된 게 아니라, 오히려 덩치에 집착하게 되면서 엉뚱하게 자유가 줄어든 셈이다.
그래도 '덩치 콤플렉스'의 권위자(?)로서 개인적인 고민 때문에 덩치를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는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덩치가 마음의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고, 덩치가 커진다고 마음도 커지는 게 아니며, 덩치에 집착하면 나만 손해라는 거다. 남들에게 무시당하거나 물리적으로 위협당하지 않기 위해 과하게 큰 덩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근력 운동은 덩치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측면에 골고루 도움이 되니까 해서 나쁠 게 없다. 집착만 안 하면 된다.
그래도 덩치가 좋다면 너무 늦기 전에 이 글을 한 번 더 읽어라! 안 그럼 나처럼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