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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May 24. 2020

과학이라는 언어, 혹은 종교

고전 20200519

혈혈단신. 이상주의자인 내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곳까지 와버려서 고생중이다.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가기로 결심하고, 컨택을 하고, 확정이 나서 오기로 결심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주. (물론 그 고민의 크기는 절대 시간에 비례하지 않았다. 결정 기간이 2주였을 뿐.) 2주안에 모든것이 결정되었고 2달 후에 이곳에 왔다. 다시 생각해도 속사포 독일행이었다.  


혈혈단신 빠르게 독일에 올 수 있던 이유

 과학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언어이다. 과학 각 분야의 최전선은 전세계 모두가 비슷한 곳에 맞닿아 있고, 서로의 것을 참고하고 발전시켜야만 이 정교한 언어를 보다 실직적으로 만들 수 있다. 분야만 통한다면, 결국 그들이 연구를 통해 해결하려는 이슈는 국가에 상관없이 비슷한 맥락이기때문에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내가 저 나라에 있을때 하던 연구는 이 나라에서도 비슷한 분야, 비슷한 수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으로인한 연구실의 분위기만 극복하면 어디에서든 연구를 바로 진행할 수 있다. 어차피 비슷하다면, 그럼 한 곳에서 진득하니 하던 연구 계속 하면 될 것이지, 왜 이곳 저곳 사람들이 많이들 이동하며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걸까.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니 물웅덩이를 바꿔준다는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결국 ‘노하우’ 때문일 것이다. 마라탕이 전국적으로 붐이 일어났다고 해도 모든 마라탕집이 대박나지는 않을 것이다. 마라탕 자체가 열풍인 것이지, 모든 마라탕집은 각각의 ‘노하우'로 마라탕을 만든다. 어떤 마라탕 집이 어떠한 재료를 어떻게 만들어서 어떠한 대박이 났더라 하는 소문을 들으면 많은 마라탕 요리사는 비법을 전수 받기 위해 그 집으로 개미떼마냥 모일 것이다. 물론, 그 비법전수에 의존만 한다고 대박은 나지 않겠지만. 마라탕의 전통과 철학을 고수하며 외길인생을 걷는 마라탕집이 있다면 그 집 또한 대박집 못지 않게 인정 받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학위를 위해 이곳을 원했고, 그들은 이 쪽 언어에 대해 알 건 대충 다 아는 사람이 본인들에게 와서 본인들의 노하우로 더 힙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을 기꺼이 찬성했다. 독일어는 아예 하지 못하며, 영어는 꿀먹은 벙어리로 말 할 수 있는 나를 뽑은 것은, 그 과학적 언어들에 대충은 익숙하여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유 하나 뿐이었다.

 게다가 과학하는 사람들의 그 너드한 분위기도 (과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전세계 공용이다. 감상따윈 없다. 자잘한 일을 가지고 분석적으로 토론하는건 소름돋게 세계 어떤 연구실이나 똑같다. 사소한 한 예이긴 하지만, 어느날 학생식당에서 육류 섭취 줄이기 캠페인으로 쓰여있는 ‘당신이 이것(돼지고기 메뉴)을 먹음으로써 이산화탄소 ~만큼이 더 생겨납니다’ 문구를 본 한 터키인 친구는 ‘이산화탄소를 정말 줄이는 길은 인간이 다 뒤지는거다’ 라고 조리사 선생님 바로 앞에서 돌려까기를 했다. (전문성과 사회성이 반비례하는 것은 아무래도 참인 명제인 것 같다.) 그걸 백번 동의하는 나도 실상 같은 종족이다,,이러한 비슷한 성향의 사람만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업무 환경에 적응하기도 썩 어렵지가 않다.  


과학은 종교가 될 수 있는가

 그래서 과학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아무런 연고가 없으면서도 지구 한구석 한반도에 있던 ‘나'라는 작은 존재를 머나먼 반대편의 대륙으로 오게 한 힘. 같은 가치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무작정 신뢰부터 하며 아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하는 힘. 과학은 ‘종교’마냥 이 시대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가 먹고 자고 선택하고 행동하고 자극하고 반응하는 모든 것들을 물리학 화학 등 기초 학문으로 그럴듯하게 비유하여 끼워맞춰 설명할 수야 있다. (자칫 유사과학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의 학문 안의 법칙들로 설명 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를 믿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삶 전체는 아니겠지만,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도 남녀노소 불문 사람들은 과학적인 무엇인가를 신뢰한다. ‘과학적’이라는 단어를 덧붙임으로써 불분명한 어떠한 상황을 한층 더 신뢰감있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은 비논리적이며 사이비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아주 가볍게 묵살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민중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장치’라고 말 한것, 프로이트가 ‘종교는 종교는 집단적 강박증’ 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과학은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을 어느정도 억압하고 강박하게 만드는 듯 하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의 확실한 가설, 증명, 결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의 현상들을 설명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모든 사람은, 본인이 이해가 가는 것은 합리적인 것이며 매력적이라고 느끼니까. 한편, 신도만큼 안티도 많은 실제 종교와는 다르게 과학은 안티팬이 많이 없는 듯 하다. 이 이유를 과학하는 사람들의 특성에서 찾고 싶다. 과학은 무엇이든 의심을 하려는 호기심많은 사람들이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맹신도가 없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맹목적으로 무엇인가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미 증명이 된 명제조차 언제든 한순간에 다른 증명들로 뒤집힐 수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의심하고 또 의심할 뿐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을 빌려 기존에 있는 무언가를 설명할 뿐, 과학은 삶을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교리’로서 작용하지는 못한다. 전도하거나 홍보하는 사람도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과학적 탐구에 대한 컨텐츠는 이미 차고 넘쳤으니 구미가 당기는 사람은 알아서 이 매력적인 학문에 빠지도록 설계되어있다. 그럼 종교는 '전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어야만 하는가. 어쨌든, 종교의 본질을 알 수 없으니 과학이 종교인지 아닌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현재까지 전 세계를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과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랜 역사동안 각 나라의 ‘국교’가 존재했던 것처럼, 우리는 지금 과학안에서 사고하고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여 과학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과학에 맞지 않는, 혹은 증명되지않은 무언가는 믿지 않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한다. 허나, 진짜로 ‘과학적'으로 세상을 보고싶다면, 과학적인것을 믿으면 안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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