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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May 24. 2020

눈 앞의, 깔 수 없는 와인 한 병

이사(20200508)

-그동안 감사했어요. 덕분에 편하게 잘 지내다 가요

-내가 더 고맙지 뭘. 세희씨 아니었으면 우리 애를 누가 그렇게 애정으로 잘 놀아줬겠어. 하여간 맘같아서는 이사 안보내고 싶다니까. 일 때문이라니까 어쩔 수도 없고.

-어유, 제가 놀아준게 아니라 같이논거죠. 저도 일년 반밖에 안됐지만, 재밌는 기억 이 집에서 많이 만들고가요. 그리고 계약이랑 이런거 편의 많이 봐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사모님.  

-나도 원래 그렇게 유한사람 아닌데, 세희씨한테만 내가 약하잖아. 어쨌든 그래. 조심히 가. 아, 그리고 이거. 세희씨 좋아하잖아. 선물로 하나 샀어. 오늘 짐 다 옮기면 무조건 먹고 싶을거같애서. 이삿짐 다쌌는데, 짐 늘리는건 아닌지몰라.

-아이고, 이런걸 다주시고 그러세요. 저는 빈손인데 민망하게… 이사 하고 집 정리되면 제대로 초대할게요.  


건네받은 이탈리아 산 와인 한병과 고마운 마음, 그리고 미안한 마음을 동시에 안고 이삿짐 센터 차에 올라탔다. 행여나 깨지지는 않을까 와인을 발 사이에 끼우고 트럭의 급커브에 따라 양발의 힘 조절을 해서 수평을 최대한 유지하도록 노력했다. 오지랖이 조금 있는 센터아저씨의 질문에 성의없이 하는 둥 마는 둥 대답을 하며, 세희씨는 이사 내내 그 와인만 바라보았다.  


애초에 전자레인지를 제외한 모든 가구는 옵션으로 내장되어 있어 세희의 개인 짐만 옮기면 되는 단순한 운반이었다. 이사는, 아니 운반은 생각보다 빨리 세 시간 내로 끝났다. 이전 도시와 두 시간 거리였으니, 짐을 내리고 올리는 데에 30분씩 걸린 셈이다. 합해서 보면 적게 걸렸다고 생각했는데 뜯어서 보니, 적게 걸린건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새로운 집은 지은 지 십여년이 되어 보이는 그저 평범한 3층 원룸 건물이었다. 주인 노부부가 관리를 하는 모양인데, 집값이 싼 대신 제대로 관리를 하시지는 않는 모양이다. 건물이 동쪽으로 뚫려있어서 오후 이후에는 햇빛이 그렇게 잘 통하지 않아 괜히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나기도 했다. 직장때문에 급하게 온 이사라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잠시 거쳐가는 용도로 온 집이니 두세 달만 참아보자, 라고 스스로 합의한 후에 온 곳이었다. 우중충한 건물 분위기 때문인지 괜히 이삿짐 아저씨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을 보여주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아서 복도에 모든 짐을 쌓아놓고 정산을 한후 아저씨를 돌려보냈다.  

현관 말발굽조차 없는 새 집이었기에 세희씨는 박스 한 개로 현관문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눈 앞에 보이는 박스들을 하나 둘 집 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다섯 개 정도 옮겼을때, 전자레인지가 나왔다. 그것은 세희씨의 짐 중에 가장 골칫거리였다는 것을 그 순간 깨달았다. 박스로 현관문을 고정하고 남은 너비로 전자레인지가 통과를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세희씨는 현관문을 고정했던 박스를 제거했다. 곧바로 전자레인지를 두 팔로 안고 현관문을 활짝, 발가락 힘으로 최대한 멀리 문을 밀었다. 현관문이 최대 각도까지 벌어지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 시간동안 세희씨는 잽싸게 안으로 튀어 들어왔다. 휴, 하며 부엌으로 들어오는 사이 전자레인지에 시야가 가려 미처 보지 못한 탁자에 무릎을 찧었다. 소리로 배출 할 수도 없는, 너무나 간만에 찾아온 그 뼛속까지 전해지는 아픔이었다. 다행히 이성을 차리고 전자레인지를 내팽개치기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자리에 주저앉아 오만상을 지었다. 창문을 보니 벌써 어둠이 가라앉은지 오래였다.  


- 그래. 파우제.


세희씨는 가능한 있는 파스타 재료로 늦은 저녁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곁들일 와인이 생각났다. 전 집주인 아주머니는 이런 일들을 예상하신걸까. 그걸 먹으면 모든 짐을 마저 다 옮기고 꿀같은 잠을 청할 수 있으리라.  


-아,,,, 이런…..


세희씨는 이전 집에서 자잘한 용품들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었다. 오늘 이사온 세희씨에게 와인 오프너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절망감은 잠시뿐, 눈앞에 있는 와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젓가락으로 안으로 밀어내기로 한다. 실패했다. 칼로 코르크를 조금씩 파내어보기로한다. 사분의 일 정도 파내었을때 와인 입구보다 큰 칼이 더이상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의 방법은 없었다. 용기내어 옆집에 문을 두드릴 차례였다. 세희씨는 새로운 이웃으로서 이렇게라도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똑똑똑)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이 아파트의 초인종 소리가 기겁할 정도로 크고 사납다는 걸 기억하고 노크를 했다.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렇게 노크를 세 번 정도 더 했을때, 세희씨는 대답 대신 현관문에 작게 달린 눈구멍 렌즈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세희씨가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파악했는지, 어떤 무표정의 사내가 나왔다.  


-안녕하세요, 오늘 옆집으로 이사온 안세희라고 합니다. 오늘 이사를 와서 아무것도 없어서요. 죄송한데, 와인 오프너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위협적인 표정이지만 그래도 빌려주려는 걸 보니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사내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세희씨는 안쪽에서 어두운 기운을 느꼈다. 어두운 불빛,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자의 우는 소리도 들리는 듯 했다. 이 아파트의 인테리어가 전부 밝은 하얀색인 것을 감안했을때 그 집에서 풍겨나오는 어두운 주황 빛은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다고 세희씨는 의심하게 되었다. 순간, 사내가 나왔다.


- 아, 와인오프너는 없네요. 죄송합니다.  

- 괜찮아요. 늦은 저녁시간에 죄송했습니다.  

- 그럼 ,,

- 혹시, 안에 누가 또 계시나요? 그래도 이사왔는데, 계시면 인사하도 하고 싶어서요.  

- 여자친구랑 같이 살고 있는데, 낯을 가려서 인사는 좀.... 그럼, 쉬세요.


사납게 닫아버린 문을 두고 세희씨는 고민했다. 본인이 워낙 예민한 성격이라 과민반응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혹여라도 바로 옆집에서 벌어질 잠재적인 범죄로서 의심을 하는게 합리적인지. 생각도 잠시, 세희씨의 눈에는 본인이 정리하지 못한 이삿짐 박스 네댓개가 복도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게 보였다.


-그래. 밥부터 먹자.  


--

새 집 생활이 이주일이 지났을까. 세희씨는 주변 환경에 적응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베란다에는 포체리카 세 송이와 몬스테라가 옮겨 심어졌고, 냉장고는 제법 로컬 티가 날 정도의 식료품이 채워졌다. 출퇴근을 위한 버스정류장을 오가는 길목에는 테이크아웃 전문 초밥집과 아이스크림 집이 있었다. 매일 보는 그 스시집을 한번 가봐야지, 매번 마음만 먹고 있을 뿐 막상 갈 기회가 없어서 가지 못했었다. 유난히 지친 하루의 퇴근길, 세희씨는 오늘이다 싶어서 초밥집을 가기로 마음먹는다. 초밥집에 들어가려고 아이스크림 집을 지나쳐 가는데, 아이스크림 집에서 옆집의 그 남자를 보았다. 옆에는 후드티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쓴 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남자는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지 않았다. 뭔가 억압되어보이는 여자. 세희씨는 신경이 쓰였다.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척 하며 들어가서 무슨 말 하는지 들어나볼까,하다가 괜한 오지랖인가 싶어 일단 초밥집에 가서 저녁부터 먹기로한다.  


가는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간만의 장기 휴가를 가버린 초밥집 주인 때문에 세희씨는 괜히 기가 쫙 빨린 기분이 들었다. 심술이 난 세희씨는 어떠한 용기가 생겼고 오지라퍼가 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는 배짱으로 아이스크림집에 들어갔다. 그러나 세희씨가 들어 간 동시에 그 남녀는 다른 쪽 문을 통해 퇴장하였다.  


-참, 여러모로 맥 빠지는 날이네.


계획을 실패했는데 아이스크림을 사먹어야 할지 말지 세희씨는 고민했다.


--

비가 오는 주말 아침이었다. 간만에 늦게 일어나서 간단한 브런치에 커피를 먹기로 결심만 하고 세희씨는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어제 보다가 잠든 스릴러 영화가 아직 42분이 남아있는것을 마저 보고 일어나기로 한다.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잠이 들다니, 피곤하기는 했나보다. 주인공은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그때, 복도에서 뚜렷하고 다급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택배 아저씨겠거니 했는데, 계속 같은 문장이 반복되는 소리였다. 순간 놀라 벌떡 일어나서 세희씨는 영화를 끄고 현관문으로 튀어갔다.  


- 사람이 다쳤어요. 거기 아무도 없나요?

살려주세요, 사람이 다쳤어요. 아무도 없나요?  

아무도없나요?  


중년 정도 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세희씨는 순간 무서웠다. 사람이 다친 것인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세희씨의 심장이 어느때보다 빨리 뛰었다. 나가도 본인이 도울 수 있는게 없을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상하기도 했다. 구급차는 이미 부른걸까, 저렇게 소리 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이미 구급차를 불렀겠지. 그러면 저렇게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목적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희씨는 잠정적인 범죄의 현상에 혼자 나가기가 무서웠다. 본인의 건물에 대한 끔찍한 팩트의 기사가 몇 시간 후에 나오면 어떻게 해야할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초조했다. 다른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건, 이 건물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도 세희씨와 같은 생각으로 망설이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무슨 일인지 눈으로 확인을 해야하나.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세희씨는 생각의 속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침대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현관문을 열지도 못하고 세희씨는 현관문에 가만히 서서 그 남자가 계속해서 내뱉는 소리만 듣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하얀 식탁에 코르크가 반 쯤 날아간, 아직도 따지 못한 와인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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