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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Mar 19. 2021

그때 그 지렁이는...

비가 오면 (20210319)

1.

여름인가보다. 내 몸 위의 수많은 감각수용체가 계절의 변화를 감지했지. 공기의 진동이 아주 강력하게 빨라진 것이 느껴지는 걸 보니 여름인 것이 틀림이 없어.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가보다. 내 어미가 집을 좋은 곳에 잡아놓아서 다행이야. 금수저가 따로 없어. 터가 좋아 기름지고 먹을거리가 풍부한 우리 마을 덕분에 나는 먹고 살 걱정 없이 그저 오늘은 이쪽 마당 가서 먹고 싸고 내일은 저쪽으로 한발짝 가서 먹고 싸고 하루하루를 유유자적 즐기고 있지. 듣는 소문에 의하면 태어나자마자 눈뜨고 보니 두더지 가족 무리가 본인들 태어나기를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던 바람에 생을 달리한 그런 식구들도 많이 있다고 하던데, 운이 없어도 그리 없을 줄이야. 이런 배부르고 행복한 이승을 맛보지 못한 게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점에서는 내 어미에게 항상 감사하는 편이지. 역시 자고로 생명체란, 날 때부터가 잘 타고나고 봐야하는 것이다. 누구 밑에서 태어났는지 그 누구가 어디 구역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후손들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니까.



2.

골로 갈 뻔했다. 아니 글쎄, 오늘 낮에는 오랜만에 과식을 하다가 배도 불렀겠다 잠시 쉬고 있는 중 스르륵 낮잠이 들고 말았는데 갑자기 배쪽에 싸악- 하고 피부 속 진피층 아랫부분까지 아주 좁고 커다란 압력이 느껴지는거아니야. 그런 다음 온몸에 전기가오듯 찌릿찌릿 하면서 곧바로 미칠듯한 통증이 느껴졌지. 잠깐 충격에 쓰러져있다 깨어보니, 글쎄 몸 아랫부분이 잘려나가있더라고. 이놈의 인간들이 흙 뒤집는다고 우리가 있는줄도 모르고 호미질을 막 신나게 해댄거지. 그 호미 날에 내 몸이 날라가버렸다구.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는데 그래도 중요 부위는 잘려나가지 않아서 어찌나 다행스러웠던지 몰라. 앞으로 당분간은 열심히 잘 먹고 잘 싸고 잘 쉬어서 몸 재생하는데에 힘써야 하겠지. 인간들이 말이야, 우리가 먹고 싸는일이 자기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생각도 안하고, 조심성없이 호미질이나 하고말이야. 우리가 얼마나 이롭고 역사가 깊은 후손들인지 모르나봐. 4억년이라지 아마. 먼 옛날옛적에 이름깨나 유명하신 똑똑한 양반이 우리 보고 '대지의 창자'라고 칭송한 것도 모자라, 그나마 최근에는 이름 깨나 더더욱 유명하신 영리한 양반은 심지어 이백일동안 우리 하루 일과랑 배설물만을 하루종일 쳐다보면서 여생을 마감하셨다던데. 그 양반은 특수한 환경에서 생존에 적합한 형질을 지닌 생명체만 생존과 번식에서 살아남는다고 유명해진 발표를 했다던가. 뭐 아무튼 인간들 조심성 없는 것은 알아줘야돼.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통 생각하지를 않는 것 같다니까.



3.

괜히 무료함이 느껴진다. 먹고 싸내기만 하는 삶이 지루한거 같기도하고 혼자만 잘먹고 잘사니 이게 무슨 삶의 의미인가 싶고 외롭기도 한 것 같고. 그리고 이렇게 음식이 사방팔방인데 나 혼자는 평생 먹어도 다 못먹으니까 이 자원이 아깝기도 하고. 아무래도,, 내 식구를 만들때가 온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이미 자식을 만들었어. 내가 낳고싶을때 내맘대로 낳을 수 있는 것이 어찌나 축복인지. 이번엔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136 개체나 되는 내 자식들이 곧 일주일 안에 태어날거야! 나도이제 가족이 생기는 거라구. 이 자식들은 전부 태어나자마자 이처럼 비옥한 땅을 물려주어 삶을 배부르게 살 수 있게 해준 나한테 감사해야할거야. 내가 우리어미한테 그랬었듯이.


4.

상쾌한 하루의 시작이다. 난 오늘도 내 아홉 자손과 열심히 먹어대러 밖에 나갔다. 결국 무리 지어 다닐 수 있는 최대치가 이정도밖에 될 수 없다는 걸, 몇 번의 산란행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언제 어떻게 태어나서 어디서 살아가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할 수십여 자손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것 뿐이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간다. 태어난지 얼마나 됐다고 그들이 벌써 자기 자식들을 생산하려고 준비중인것만 같다. 그래, 무럭무럭 자라서 마구마구 낳아라. 어차피 이 드넓은 땅, 수백 수천여 아이들과 함께 소유해도, 어차피 풍요로우니까 말이야. 습기가 느껴진다 비가 오려나.


5.

비가 내린다. 이번에는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들어. 습도가 얼마나 높은 건지 감도 오지 않아. 근데도 나는 살면서 촉촉하게 적셔지는 이슬비만 봤던 터라 별일 있겠어, 하는 안일한 마음으로 애들 몇 데리고 같이 산책이나 한번 하고 점심밥이나 양껏 먹고 가자고 밖에서 여기저기 좀 돌아다녔지. 근데,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거야. 우리는 밥먹다 말고 얼른 집에 들어가서 남아 있는 애들을 살피러 갔지. 아뿔싸. 우리 집이 이미 반 이상이 잠겼더라고. 집 안으로 들어가서 애들을 일단 밖으로 대피시키고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려는데,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 나도 경황이 없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거야. 그러다가 물이 배수로 빠지는 속도보다 위로 차오르는 속도가 더 크다는 것을 더이상 숨이 쉬어지지 않는 걸로 깨달았어. 우리의 모든 숨구멍을 빗물이 막아버리고 있는거야. 상황이 다급함을 느끼고 나는 애들을 모두 다 거느리고 수면 위로 올라왔어.


6.

정말 십년감수했어. 너무 놀랬던 나머지 우리는 잠시나마 흙에 트라우마 비슷한 게 잠시나마 생겼나봐.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우리는 대지를 떠나서 허겁지겁 아스팔트 위로 올라탄거야. 숨을 돌릴 겸, 스트레칭도 해 보고 심호흡도 하는데 생각보다 빗물은 아주 시원해서 기분이 좋더라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하나 없고 우리만의 세상이었지. 잿빛 하늘에 가려진 햇살 한줄기도 어찌나 근사하던지. 우리는 한동안 감상에 빠졌지. 그러다가 나는 저 멀리서 우리랑 똑같이 생긴 어떤 생명체들의 무리를 보게 된거야. 아, 그들도 아마 이 물난리를 겪고 수면 위로 대피를 한 모양이야. 문득 나는 본능적으로 직감이 들더라고. 내 잃은 자식들이 저기에 모여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전속력으로 몸부림치며 그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어. 뒤에서 오히려 애들은 나에게 멀리 가지 말라고 위험하다고 소리치고 있었지. 그런데 어라, 이거 뭐야. 사실 나는 아스팔트를 처음 밟아봤거든. 근데 글쎄 이게 오돌토돌하니 마사지 효과가 있는지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너무 시원한거야. 기분이 참 좋았어. 이런 유토피아를 두고 땅속에서만 지냈던 지난날이 조금 후회스러워서 앞으로 종종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나는 한참동안 그 잠재적 자식들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어.

7.

얼마나 달렸을까. 점점 몸이 지쳐갔지. 아스팔트 마사지 덕분에 온몸에 긴장은 싹 풀리고 하늘에서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고 나른한 기운이 온몸을 확 휘감는거야. 생각해보니 오늘 비 소동을 겪으면서 심지어 아침부터 공복이었네. 안 피곤한게 이상할 정도였지. 잠깐 쉬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그대로 잠시 눈을 붙였어.


8.

상쾌한 바람 온몸의 세포의 감각이 살아나네. 햇살도 눈이 부시게 비치는 모양이야. 몸이 정말 말도안되게 가벼워진 느낌이야. 마치 온몸의 세포들의 세포액이 거진 모두 증발해버린 느낌이랄까. 폭풍처럼 쏟아진 비에 분노하기만 했는데 그래도 그 비 덕분에 내가 이런 가벼워진 기분도 느껴보는구나. 너무 멀리왔나봐. 애들이 기다리겠어. 비도 그쳤르니 일단 집으로 돌아가보자. 피로도 싸악 가셨겠다, 되돌아 가려고 눈을 떠보은데 눈이 떠지지 않는거야. 아아 이것이 햇빛이구나. 평생을 어둠속에서만 살았던 내 눈이 이런 햇빛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리가 없지. 그래도 따뜻하니 아주 밝고 아름답구나.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수용기관을 동원해서 미세한 진동과 빛의 방향을 감지해서 가던 길의 방향을 찾아나가려해. 그런데....그런데말이야. 왜 몸이 바닥에서 떨어지지가 않지?몸은 분명히 미친듯이 가벼워졌는데?점점 가벼워지는거 같은데. 가벼워진부분의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거같은 느낌이야. 어,,?아니 무슨일이지. 도대체 나한테 무슨일이....이..ㄹ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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