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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Mar 05. 2021

상상력이 현실이 되는 티핑포인트

택배(20210305)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설렘은 10월 말부터 시작된다. 마켓이 열리고 글루바인을 마시고, 트리를 꾸미고, 선물 리스트를 작성한다. 내 선물로 웃음지을 가족과 친구들의 얼굴이 그려지고, 따뜻한 집안에서 뭔가 따뜻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에 사로잡힌다. 아무런 특별한 약속도 없을 걸 알아도 괜히 설레고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리고 그 설렘은 이브날이 24일에 절정을 달한다. 그러나, 막상 12월 25일이 되면 그저 일요일 비슷한 휴일이 되버리고만다. 새해를 향한 두려움 반 설렘 반이 남아있지만, 그것 조차 소진하면 결국 역시나 기다린 만큼 공허함은 커질 뿐이다. 여행도 마찬가지. 어느 나라에 어느 도시에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고 거기에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생각과 감정은 어떤 종류들일까, 끊임없이 상상한다. 설레는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 결국 목표지점에 도착하면 피곤함에 빨리 밥먹고 들어와서 쉬고싶은 생각부터 들어버리지만.

  택배도 그런 기다림의 한 종류이다. 내가 주문하는 이 물건과 함께라면 달라지는 새로운 내모습이 그려진다. 저 아이패드만 손에 쥐면 저절로 그림을 잘 그리고 있는 내 모습이 그려진다. 상상 속의 나는 완성되지도 않은 상상 속 포토샵 그림을 보며 자화자찬을 한다. 이런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나는 정말 멋진 사람이야. 그러나 항상 설렘은 거기까지다. 막상 실물을 확인하고 나면 그냥 그 물체는 이제 당연한 나의 것이 되고, 더이상 설렘을 주지 못한다. 며칠 새 그것은 내 일상의 현실로 전락해버린다. 풍부해진 상상력은 실물을 영접하자마자 현실이 된다. 막상 그 패드를 손에 넣고나면, 그저 평소 보던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폰보다 조금 더 크게 보는 장비가 되어버릴 뿐이니까. '상상이 현실이 되어버리는 티핑포인트'가 또 일어났을 뿐이다.

  금방 깨져버릴 상상력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기다림은 설렘이고 즐거움이다. 한해한해 거듭 반복될수록 살던 대로 살며, 익숙한 것들만 하며, 많은 것들에 기대감이 없어지고 기억할 만한 일도 없어지는 점차 지루한 이 일상 속에서 그래도 그 기다림은 내가 또 오늘 하루를 버텨낼 수 있는 강력한 즐거움이 되곤 한다. 중학교 2학년 가을 소풍 하루 전의 그때 그날의 그 감정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선명하다. 한참 인터넷 쇼핑에 입문해서 하교 후 11번가에 중독되고, 무통장 입금을 위해 은행을 밥먹듯 드나들었던 그 시절이었다. 소풍 일주일 전에 주문한 옷 배송이 지연되어 못 입으면 어쩌나 하는 긴장감과 저걸 입고 소풍가는 내모습이 너무 멋있을 것 같은 지독한 설렘의 감정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할 만큼 너무 강력했다. 쉬는시간마다 판매처에 전화할 정도였으니.. 이 정도로 강력하지는 않더라도 택배를 받는 설렘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배송 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배송대기중이 배송중으로 드디어 바뀌었을때의 설렘, 그러니까 곧 그 물건을 받게 될 나를 상상할 때 오는 행복감은 누구든 알고 있을 것이다. 택배를 받고 언박싱을 할때도 새로운 나의 것을 보는 것에 설렌다. 상상력이 사치가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내 설레는 미래를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반복되는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별것도 아니지만 확실한 행복이 아닐까.

  그런데 나날이 빨라지는 배송으로인해 이 기다림의 즐거움의 시간은 줄어드는 듯 하다. 오늘 주문하면 내일 도착. 하루배송, 로켓배송, 당일배송이 당연한 세상에 살고 있다. 무료로 2일만에 배송을 해 준다고 이미 구독자 1억 5천명씩이나 확보한 아마존은 당일배송, 5시간 배송을 넘어 이제는 30분 드론배송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 세계 여느 급진적 빠른 발전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느린 물류 시스템 강국의 타이틀을 지키던 독일까지도 이제는 익일배송이 당연해져서 어쩌다가 3일만 걸려도 괜히 불쾌감이 들곤한다. 빨라지는 배송만큼 상상력으로 하루하루를 채우고 기다림으로 나날을 버텨내는 기간도 짧아지고 있다. 잽싸게 와버리는 택배 때문에 기다림의 설렘 또한 금방금방 비워지고, 공허함을 메우려고 또다시 다른 주문하기를 만들어 내게 하는 것을 보니, '소비자의 편리함'이라는 명목 아래, 공허함을 물질로 계속해서 채우라는 대기업의 여전한 자본주의 마인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우리들이 무슨 요일에 대충 몇시쯤, 어떤 브랜드를 어느 장소에서 주문할지 어느정도 알아서 미리 준비해 놓는 그들은, 조만간 내 집앞에 내가 시키지도 않은 택배를 가져다 놓고, '넌 이게 필요했어. 난 너보다 널 더 잘 알아. 자, 이제 돈 내.' 라고 할 지도 모른다. 내 상상력과 기다림의 즐거움을 앗아가버린채.

 (그래도 구독자로서 아마존 프라임 사랑합니다.,,,핵편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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