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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Feb 27. 2021

내가 영어를 못하는 이유

금요일(20210226)

 발표는 망했다. 내용이 부실하거나 자료를 잘 만들지 못하거나 했던 문제가 아니다. 너무나 뻔하게, 영어때문이었다. 영어로 발표를 하는 자체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싶은 것을 추려서 내가 흐름을 만들고 내가 말할걸 미리 찾아서 대본을 써서 아예 외우거나, 시간을 들여서 연습하면 된다. 문제는, 발표 이후의 질의응답시간이다. 갑자기 훅 들어오는 질문에, 그러니까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의 흐름에  당황하면 나는 제아무리 간단한 질문이라도 질문 자체부터 이해부터 하지 못한다. '나는 영어를 못알아듣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가둬버리고 매 순간을 시작하는 나에게 그런 즉흥적인 상황을 영어로 해결할 여유가 있을리 없다.  내 입밖으로 특정 지식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타인이 보기엔 그저 애초에 내가 그 지식을 가지지 않아서라고밖에 보이지 않는다. 몰라서 대답을 못하는게 아닌데...괜히 억울함을 느껴 더욱 주눅이 든다. 게다가, 대부분의 그 민망한 순간을 웃음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나를 보며 느껴지는 수치심까지.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는 영어 공포증,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그러나 이런 나에게도 영어의 신이 영접할 때가 있으니, 바로 '술'이 들어갔을때이다. 파티에서 술을 마시면서 연구소의 동료들과 대화할때  내가 뱉어내는 어휘력과 문장 구성력 그리고 신속한 스피드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취해서 그렇게 착각하는거라고 나도 의심을 해봤다. 그런데 원래 언어의 존재 이유는 의사소통이다. 평소에는 가능하지 않던 쌍방의 의사소통이 아주 원활하게 된다는 자체로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난 영어를 아주 잘 하는 사람이 된다. 술을 마시는 특유의 분위기로 인해 경계심과 긴장감은 누그러진다. 그리고 '내가 영어를 못해도 술취해서 그런거니까 알아서 넘겨주겠지' 라는 내려놓음 덕분에 대화의 장벽이 아주 낮아진다. 심지어 나는 가끔 영어로 꿈도꾼다. 그러니까 사실 문제는 영어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대화하는 상대방과의 '심리적 거리감'때문이다.

    누구나 남이 말하는 것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다. 잘못 알아 들어서 생기는 해프닝은 늘상 겪는 일이니까. 그러나 남이 말하는 것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면 어색한 상황을 만들거같아서 과도하게 늘 긴장하는 탓에, 무의식중에 나는 나에게 말을 거는 타인을 '어색한 상황을 만들게 하는 원인 제공자'라고 여기는 듯 하다. 그래서 대화를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나는 말을 거는 그 사람을 부정적 존재로 인식하고 가능하면 나를 무능하게 만들수도 있는 그 대화 자체를 피하는 것이다. 대화를 하지 않아 친하지 않아지고 친하지 않으니까 대화를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심리적 거리감은 문화 차이로부터도 조금씩 축적이 된다. 한번은 동료 집에 초대받아서 놀러갔던적이 있었는데, 7명의 유럽권 친구들과 나 이렇게 8명이었다. 굳이이렇게 유럽과 아시아권으로 나누어서 기억하게 된 것은, 그때 그들이 하는 대화주제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유로비전'이라는 것에 대해서 몇시간을 얘기했다. 나는 유로비전이 유로 같은 또다른 화폐의 단위일까, 정치권에서 나오는 어떤 정치적 성향에 대한 이야기일까 혼자 생각하며 그 속에 있었다. 핀트를 잡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웃는 타이밍에 맞춰 억지로 웃는 것 뿐. 그러다가 그들이 폰을 돌려가며 유튜브를 재생하는걸보고 그 '유로비전'이라는 것이 유럽연합 버전 '슈스케'라는걸 알았다. 유럽 각 국가에서 참여하는 참가자들의 서바이벌 게임이었기때문에 국적경쟁까지 더해져서 보다 더 치열하고 그렇기 때문에 히트곡도 아주 많이 나왔나보다. 이걸 중고등학교때 겪은 그 친구들은 그 추억의 곡을 떼창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는 서로는 문화적 위화감이 전혀없었다. 굉장히 무안하고 민망한 하루였다. 나도 슈스케 참가자라면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는데,,나도 슈스케 나온 노래들 가사까지 안틀리고 다 떼창할 수 있는데.. 그렇게 작고 큰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는 심리적으로 거리감을 쌓았다.

  신기한 것은 중국 친구들과는 영어로 소통이 아주 잘된다. 서로가 잘났다못났다 사이가 안좋은 국가들이지만 이렇게 머나먼 나라에서 만나면 서로의 감정, 문화를 너무 잘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소수자로서 서로 애틋함마저 느낀다. 물론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거기에서 또 문화차이는 생기겠지만 일단은 이곳이기때문에 생기는 아시아 유대감이랄까. 그래서 그들앞에 서면 내가 틀리게 말해도 부끄럽지 않고, 틀리게 말해도 서로 소통이 잘 된다.

  사실 나는 내 영어 문제의 원인, 그리고 해결방법까지 이미 다 알고있다. 어쩌면 난 그냥 그 무능함에 숨어서 쉽고 편안한 길 위에 있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문화 차이가 느껴지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대화를 시도해보는 정석적인 방법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어떠한 외부 상황들을 크게 받아들이며 에너지 소모를 느끼는 예민한 인간유형이라서 그럴수없다고 단정짓는다. 어쩌면 난 그냥 그들과 친해지기 싫은거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도전하고 상황에 맞부딪치던 과거를 추억으로만 남겨둔 채, 그때처럼 더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흘러오던 그대로의 관성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날 보니 나이가 들어가기는 하고있나보다. 그래도 아직 이대로 더 망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 남아있는 최소한의 강박의 힘를 사용해야겠다. 오늘은 넷플릭스에서 영화 하나 골라서 영어자막만 틀고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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