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고
유리잔이 있다. 떨어뜨린다. 박살 난다. 잔은 유리로 변해 사방으로 튄다. 나는 그것이 쓰레기라고 내내 생각했었다. 무엇을 담을 수도 없고, 뾰족하여 어디 넣어 다닐 수도 없으며, 잔의 모양을 하고 있지도 않다. 그것은 더는 잔이 아니다.
그렇다, 잔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유리 조각이다. 유리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가끔 햇볕을 쬘 때면 아름답게 빛난다. 끝을 둥글게 깎아 한꺼번에 뭉치면 조약돌처럼 반들댄다.
내가 잔이었던 순간은 길지 않다. 모두가 언젠가 떨어져 유리로 흩어지지만 나는 너무 빨리 깨졌다. 내가 박살 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괜찮아, 이어 붙이면 다시 잔이 될 수 있어.'와 맥락이 비슷한 위로를 해주었었다. 그런데 나는 조금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붙일만한 조각이랄 게 남지 않았다. 나는 깨진 잔이 된 게 아니고 산산이 부서진 유리가 됐다. 그렇다고 바로 포기한 건 아니었다. 조금 큰 조각들을 찾아서 서로 붙여보려고 무던히 애썼다. 그래도 성공하지 못했다. 겨우 다시 붙여 잔 비슷하게 만들어 놓으면 또 깨질 일이 생겼다.
꽤 오랜 시간 나는 그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무엇을 담을 수 없는 잔은 버려야 할 때가 된 잔들뿐이다. 나도 그렇게 변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누군가들이 이야기하더라. 잔은 잔이고, 유리는 유리고,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이라고. 내가 박살 나 유리가 되었다면 그건 그냥 유리가 된 것이라고. 고치려고 애쓸 이유가 없고, 용도를 찾아보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다고.
나는 못 쓰는 잔이 아니라 그냥 유리 조각인 것이다. 내가 죽음을 반추하며 처음 잔이 깨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손 치더라도, 혹은 다시 잔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간절히 빌더라도, 나는 그냥 유리다. 인정해야 한다.
박살의 순간은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고 때문에 나는 항상 내 존재에 스스로 찔려가며 살아왔다. 나를 안으려고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더 깊게 찔렸다. 그런데 유리 조각의 특성이랄 게 원래 그렇다. 원래 뾰족하고, 원래 함부로 만지면 안 되며, 원래 사람을 찔러온다.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인 것이다. 원래 뾰족하고, 원래 함부로 만지면 안 되고, 원래 사방을 찔러가며 사는 사람.
아직도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제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어느 때가 오건, 부서지게 된다면 이 말을 늘 기억하자. 잔은 잔으로, 유리는 유리로 돌아간다. 먼지는 먼지로, 재는 재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잔을 다시 굽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언젠가 또 부서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유리가 되어 아프게 찔릴 것이다. 핏방울이 떨어질 때 약속할 수 있다. 우리 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지는 말자고…… 깨진 조각도 유리잔처럼 하나의 존재일 뿐이라고. 존재로부터의 고통에 너무 오래 시달리지 말자고. 살자고. 그냥 한 번 살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