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4 (수)
아침 5시 반. 쏘카를 빌려서, 4년 간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율동 공원에 갔다. 공영 주차장에 주차하고 작은 댐처럼 언덕에 난 계단을 오르니 눈에 바듯이 담기는 안개 낀 저수지와 지붕처럼 하늘을 가리는 나무, 일직선에 가깝게 난 산책길과 벤치가 그림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영화처럼, 그 순간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걸었다. 세 발자국 차이로 얌전히 쉬는 청둥오리들도 보고, 산누에나방을 잡는 까치도 보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이제는 내게 누나 뻘 정도의 나이 차로 보이는 엄마와, 어제도 그제도 나와서 이렇게 조깅했을 듯 싶은 아저씨들을 지났다. 그러다 보니 저수지 중앙에 보였던 풍차 언덕으로 향하는 길을 만나 가보았다.
작은 언덕의 풍차를 중심으로 벤치 몇 개와 저수지 중앙을 바라보는 흔들 의자가 맞이하고 있었는데, 밤에 오면 드라마같은 고백 또는 프러포즈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다만 지금 곁에는 그럴 사람도 없고, 당분간 이곳을 다시 올 기약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OST까지 삽입하려던 나를 현실로 잡아끌었다. 그렇게 다시 현실적으로 돌아와, 오픈 시간보다 너무 늦지 않기 위해 서판교의 잼앤브레드로 향했다.
8시보다 살짝 늦게 도착해서 치킨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토마토 수프를 시켜 먹었다. 커피는 블루보틀에 갈거니까 패스. 근처의 테라로사가 하필 이달 초에 문을 닫는 바람에, 덕분에 멀리도 간다. 두 개만 시켰는데도 2만원에 가까운 살인적인 금액이 나왔지만, 샌드위치 한 입과 수프 한 입. 그리고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테라스와 아기자기한 화분 너머 풍경은 나를 현실에서 다시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이끌었다. 지나간 일을 맘에 두는 편도 아니고, 잘 기억하는 편도 아니다. 하지만 잠시 감상에 젖어 예전에 지인과 서판교의 다른 곳에서 점심도 먹고, 도서관도 가보고, 카페도 가고, 산책도 하던. 그랬었던 시간을 회상하게 될 만큼 꽤 인상깊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사치를 부리다 보니 시간이 9시를 향해 가고 있었으므로, 다시 차에 올라 타 오전 근무 준비를 위해 방으로 돌아와 차를 반납하고 5분 거리의 스타벅스에서 하시엔다 알사시아로 내린 아이스 오늘의 커피를 오전 마실거리로 가져왔다. 평소라면 오후에 블루보틀을 갈거니까 사지 않았을텐데, 스타벅스에서 직접 운영하는 농장의 원두라는 정보가 점화 효과로 작용해 충동 구매를 하게된 것 같다. 어쨌든 덕분에 잠을 달랬다.
판교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려 했는데, 벌써 원하는 코스가 품절되어서 옆에 있는 현대백화점 지하에 갔다. 오크베리라는 아사히베리를 메인으로 이것저것 토핑을 얹어 스무디같이 주는 매장이 눈에 들어왔는데, 배도 그렇게 고프지 않고 어디서 들어본 매장이라 대표 메뉴를 시켜봤다. 기본 사이즈 스무디가 대략 만 삼천원. 밥 값을 간식에 태웠다. 그러고는 블루보틀에 갔다. 르완다 아이스를 시켰는데 눈이 뜨이는 맛이었다. 원두도 살걸 그랬나? 다음 달까지 생각해봐야겠다.
광화문점이나 역삼점에서 알던 분들도 이곳에서 일하시고, 며칠 갔더니 몇몇 새로운 분들도 조곤조곤 말을 붙이며 아는 채를 해주셔서 감사했다. 이런 점들 때문에 기회가 될 때마다 블루보틀에 간다. 내게 오아시스 같은 곳. 쿠폰도 적립도 없고 텀블러 할인도 300원밖에 되지 않고 와이파이도 없으며 좌석 수도 적고 비싸지만, 경계하고 계산해야 하는 세상에서 마음 비우고 스몰토크를 하다 오롯이 혼자 쉴 수 있는 곳이다. 저녁은 집으로 돌아와 파파존스를 시켜 먹었다.
이렇게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며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사치를 부린 이유는, 맞다. 마지막으로 판교에서 오늘만 살아보기로 계획했기 때문이다. 평소같으면 아침은 네이버 페이로 편의점에서 지파이를 사와 샌드위치 만들어 먹고, 점심은 구내식당. 커피는 직접 내려서 마시고 저녁은 집에서 또 해먹었을 테지만, 이제 판교 생활을 정리하는 마당에 성남 생활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억이 드라이브도, 율동 공원도, 서판교도, 백화점도 아닌 내 집과 반경 10분 거리에서 이뤄지는 루틴적인 생활이 전부라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래서 여행 왔다고 생각하고 살아봤는데, 덕분에 잊을 수 없는 하루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오늘의 하루가 나의 진짜 일상이라면 좋겠지만, 아직은 그랬다간 파산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진짜 일상이었다면, 본가로 내려가는 이 상황이 생기지도 않았겠지. 이제는 가끔 사무실로 출근하는 것도, 서울 경기에 있는 친구들을 보는 것도 전보다는 불편해지겠지만 그리 씁쓸하진 않다. 나의 진짜 집인 대전으로 곧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설렌다. 여기서는 혼자가 아니니까. 대전에 눌러앉을지, 언젠가 다시 수도권으로 올라가는 날이 올 지는 모르겠다. 다만 우여곡절로 방 계약 기간이 남았음에도 설 연휴부터 본가로 내려와 지낸 덕분에, 따로 만나는 사람도 직장도 없는 대전에서 루틴화된 일상이 이젠 더 편하다. 좋았던 일도, 좋을 뻔 했던 일도, 당분간 좋을 일도 이곳이 더 많기도 하고. 당장 확실한 건, 돈을 더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같은 고금리 고물가 시대에 주거비가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건, 가만히 앉아서 연봉을 높인 것과 다름없다. 그런 환경이 조성된 것에 감사하면서, 안주하지 않고 발전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혼자 생활하며 나를 더 알게되었던 시간을 선물해준 판교 생활. 그렇게 섭섭하지만 시원한 마음으로 일장춘몽같던 판교 생활에서 깨어날 준비를 해본다.
짐 정리는 또 내일로 미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