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SJ Nov 18. 2024

카키색 호떡

2024.11.17 (일)

'경험도 중요하지. 하지만 사람은 책을 읽어야 해. 본인이 경험해본 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독서가 필요없다고 하는 건 정말 단순한 생각이야.'

시침이 10과 11 사이를 방황하던 시간, 구석에 대충 책을 던져 놓고 여태 유튜브를 보며 놀던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서도, 문득 비장한 각오를 하고선 마지막으로 읽던 내용이 뭐였는지도 가물가물한 불변의 법칙을 꺼내 이제 막 두 페이지를 읽어가던 중이었다.

"아들, 이런 거 본 적 있어?"


아버지의 목소리와 발소리가 경주하듯 다가왔다. 소위 갓생 라이프를 재개한 지 5분도 채 안되었기 때문에, 방해받기 싫어 건성으로 대꾸했다.

"아뇨. 처음 봐요."


손에는 책이 들려 있고, 목소리도 심드렁했지만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까지 들어와 싱글벙글하며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카키색의 무언가는 코스터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방풍 소재로 보이는 재질이었는데, 가로선 중앙에 단추가 있어 마치 포켓몬스터의 몬스터볼을 납작하게 짜부시킨 것 같았다. 확실히 처음 보는 것이긴 했다.

"이런거 처음 보지?"

"뭔지 궁금하지?"


마치 이 순간을 위해 고이 접어두었던 것 처럼, 관심을 유도하는 아버지의 질문 세례가 이어졌다. 하지만 평소 나의 관심사 밖인 것에 대해 이따금씩 열변을 토하곤 하던 아버지 성격 상, 조금이라도 관심있다는 모습을 보였다간 이것의 용도에서부터 어떻게 구한 물건인지까지 일장 연설을 모두 들어야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책을 읽고 있던 흐름을 끊겼다는 약간의 짜증이 더 컸기에

"그러네요."

라고만 간단히 대꾸했다. 이제 막 집중력이 올라오던 참인데, 관심도 없는 물건의 구석기시대 역사부터 들을 순 없다. 더 흐름이 깨지기 전에 어서 다시 책을 읽어야 한다.


더 대화할 생각이 없는 나의 모습이 완고해보였는지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 천천히 방문을 나섰다. 방을 나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약간의 안도를 느끼다, 문득 방금 보여주셨던게 대체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나중엔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몰라. 멀어져가는 아버지와의 거리만큼 커져가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황급히 아버지를 불렀다.

"그게 뭐에요?"


그 한마디에 다시금 들뜬 목소리로, 아버지는 뒤돌아서며 다시 방으로 들어와 그것을 보여주었다.

"꼭 호떡같지? 이게 모자야. 아버지가 이거 쓴 걸 보더니 네 어머니가 거지같다고 하시는거 있지."


단추를 풀고, 가로선으로 생각했던 것의 양쪽을 잡고 뒤집어 가장자리를 잡고 중앙을 잡아당기자 정말 벙거지 형태의 모자가 나타났다.

"아버지가 왜 이걸 보여주는지 알아?"

대답할 새도 없이 아버지의 말이 이어졌다.

"아들이랑 얘기하고 싶어서."


나는 그제서야 내가 너무 냉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젠체하며 책 읽는 척을 하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미안해서, 그저 순수한 마음을 외면해서,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나의 당혹스러움이 차마 얼굴에 그려질 새도 없이 그걸 곧장 머리에 쓰고, 장난기 있는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웃기지?"


정말 웃긴 모습이었음에도 감정 표현이 서툴러 호들갑 떠는 리액션은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저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역시 혈연인 것일까. 돋보기로 봐야 보일 내 나름의 열정적인 반응을 알아차리신듯, 아버지는 그 정도의 반응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신 듯 옅은 미소 뒤로 숨길 수 없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지으며 모자를 벗으셨다.


그렇게 싱긋 올라온 입꼬리를, 마치 몬스터볼로 들여보내는 포켓몬스터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모자를 다시 카키색 호떡으로 만들어가는 동안 내내 내려놓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판교 생활을 정리하며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