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나’라는 착각이 사라지던 날

2025.05.20 (화)

by JSJ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누구’냐고 표현하지 않고 ‘무엇’이냐고 자문한 것은, 좀 더 근원적인 고민을 유도할 수 있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누구냐고 물으면 당연히 지금 거울에 비치는 당신, 그게 나라고 할테니 말이다.

이 질문은 순전히 하나의 영상 때문에 생겨났다.


하버드대 뇌과학자의 깨달음​


특히 이 영상의 썸네일 때문이었다. 썸네일에 서술된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라는 착각이 사라지던 날


’나는 나지, 왜 착각이 사라졌다고 표현했을까?‘로 시작된 궁금증은 이 영상을 17일 토요일에 본 이후부터 오늘 아침에 이르기까지, 나흘에 걸쳐 생각해 봤지만 쉬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키, 몸무게, 체형, 성별 등 지금 거울에 보이는 모습이 ‘나’이고, 내향적이며 중요한 순간에 직관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으며 논리를 선호하고 무엇이든 확실히 결정되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게 ‘나’다.

세상에 신경 쓸 것도 많은데 여기서 굳이 더 ‘나’를 의심하고 근본적으로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질문의 저의가 아주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읽었거나 읽고 있는 이 책들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어렴풋이 이해가 가긴 했다.

이기적 유전자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생각에 관한 생각

정리하는 뇌


사고에는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에 우리는 직관이라는 어림짐작 기술(heuristics)을 사용하는데, 비록 그 과정에서 편향적 사고를 하게 되더라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개별적으로 세세히 분석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포함한 에너지 관점에서 효율적인 방법이므로, 이렇게 최대한 간소화하여 판단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고하려 한다. 착시도 이것의 한 종류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에너지를 극히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는 ’의식‘이라는 영역에서 외부에서 들어오는 입력 값들 중 자주 쓰이는 값들을 선별하여, ’무의식‘이라는 영역에 넣어 자동화를 완성한다. 주차를 할 때 내가 핸들을 몇 바퀴 돌렸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운전을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뿐이다.


이때 우리가 의식에서 입력 값들을 선별하는 과정에 호르몬, 즉 그중 일부는 감정으로 표현되는 물질의 영향을 받는다. 그것이 필요든 쾌락이든, 현시점에서 욕구를 채워주는 입력 값들은 더 많이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영상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좌뇌와 우뇌를 설명하며, 뇌의 가소성으로 인해 사고의 프로세스마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좌뇌: 현실 지각 기능을 담당 (MBTI로는 ST로 표현될 만한 것들. 언어를 이해하고, 숫자를 세고, 논리를 따지고, 이러다 지각하겠다는 경고를 의식에 띄워 올리는 영역)

우뇌: 통합 지각 기능을 담당 (MBTI로는 NF로 표현될 만한 것들. 감정을 느끼고, 공간을 인지하고, 창의적 발상을 하고,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인생에서 지각이 대수인가?라는 생각을 의식에 띄워 올리는 영역)


우리가 SF 영화나 게임, 드라마를 보면 시한부 선고를 받아 로봇에 뇌를 이식한 박사이자 누군가의 아버지를 그린 모습이 간혹 나온다. 이 모습을 생각해 보면 박사의 지인들은 비록 몸은 깡통로봇일지라도 말투부터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까지 지인들이 알던 바로 그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전히 그것을 박사이자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나’라는 건 결국 편의 상 육체를 지칭하긴 하지만, 정확히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의식에 포착된 것들을 특정 방식으로 무의식에 저장하는 프로세스‘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인지하고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의식마저 사실은 순전히 생물학적 필요에 따라 프로그래밍된 것이기에,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하지만, ‘나’에 대해 고찰한 결론이 여기서 끝난다면 허무주의에 젖고 만다. 그리고 영상 속 뇌과학자도 이런 뜻으로 본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오후 퇴근 후 빨간 춤을 추는 장미들이 반기는 길을 따라 헬스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우뇌에게서 색다른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까지 고찰한 이유는, 스스로를 한정 짓지 말기 위해서다.


내가 하는 행위들은 결국 무의식이란 자동화 공장에 납품할 물건들을 선별하는 의식을 위한 행위들이다. 그리고 나는 내 무의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언젠가 인생의 한 사이클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를 사회의 기준이나 스스로가 정의한 한계에 가둘 필요가 없다.


유치원 다닐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모두 바뀌었지만 여전히 ‘나’라고 인식하듯이, 기본적인 법규나 자신만의 어떤 최소한의 기준에 대해선 유지하되 그 밖의 것들은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면 좋지 않을까?


’전혀 모르는 분야라 이 나이에 뛰어들기엔 늦었어‘,
‘난 숫자 세고 논리 정연하게 말이 안 나오더라’,
‘영어는 고사하고 한국어 하나 하기도 어려워’,
’내향적이라 표현을 잘 못해‘,
‘동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개인의 편차에 따라 정말로 성과가 더딜 수도 있고, 객관적으로 봤을 때 진정 현명한 판단이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이것이 ‘나’의 특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중에서 사실은 스스로에게 한계를 정해주고 있었던 생각이 있다면, 한 발짝이라도 좋으니 조금 더 용기를 내봐도 문제 될 것이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언젠가 무로 돌아갈 ‘나’라는 것의 실체는 없지만, 그 정의는 내가 규정한 것이니까.



한 번뿐인 인생에서 한계라고 생각했던 것에 딱 한 발자국만 더 내디뎌볼 용기를 가지는 것.


이것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질문한 이유이자, 이해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내가 하루아침에 바뀐 것이 아니듯이,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앞으로의 인생에서 적어도 ‘해볼까?’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그리고 그 나비 효과로 내 무의식에서도 한계로 규정한 것들을 조금씩 가능성으로 규정해 가는 것.


이 깨달음이 남은 삶에 있어 큰 자산으로 남아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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