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에세이

멈춰 선 이유

2025.05.12 (월)

by JSJ

밤 9시 55분. 가볍게 운동하고 이제 막 건물을 나서며 고개를 들었을 때, 빨려 들어갈 듯 노란 불빛을 내는 보름달과 마주했다.

피할 수는 없었다. 이미 발걸음을 듣고 마중 나와 문 뒤에 얌전히 앉은 고양이처럼, 깜짝 놀라게 하려고 기다리다 짠 하며 나타난 애틋한 사람처럼,

커튼을 치고 창문을 꼭 닫고 일하다가 퇴근 후 커튼을 걷었을 때 이미 백설기 한 판을 만들고 있던 겨울밤의 눈처럼, 그렇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보기만을 기다린 듯한 밝고 둥근 대상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마주한다는 건,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공허함과 같은 이유에 대한 안도가 혼재되는 순간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차도, 사람도 발소리조차 아껴가며 귀갓길을 재촉하기만 하는 적막 속.

오후 6시의 노을 물이 살짝 든 햇살을 걸친 벚꽃 나무를 보고 사진을 찍은 것이 벌써 작년이며,

벚꽃 끝에 걸린 초승달을 찾아 눈에만 담은 것이 올해요,

이제는 벌레 먹은 잎이 무성한 키에 닿을락 말락 한 벚꽃 나무 아래로 붉은 입술을 내보이기 직전인 덩굴장미 옆에서 운명 같은 보름달을 마주한 것이 지금이다.

어릴 적 비디오를 빌리곤 했던 만화책방도, 초등학생 때 같이 학원을 나와 이 길을 걷던 친구도, 이 사진을 보내줄 사람도 이젠 없다.


부모님이 계신 본가로 돌아온 지도 벌써 훌쩍 넘은 1년.

흘러만 가는 시간 속 모든 것이 떠나 만 가는 이곳에서 남아있는 것은 저 건물과 그 위의 달과 그를 가리는 벚꽃나무와 그 아래의 장미와 그 옆을 지나는 나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과, 그것을 반씩 닮은 것만 남았다.




감상을 곱씹으며 귀갓길을 서성이기만 하던 사람은 그의 폰에서 나는 Slack 알림 소리에 이내 입술을 앙다물고 달을 등지고 강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납득할 수 없는 요청들로 쌓인 메시지들을 읽어보며 집에 돌아오는 5분 남짓한 그 찰나에 아드레날린이 주체할 수 없이 솟구치고는 차갑게 냉정해지는 사람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달 앞에서는 스스로를 지킬 박사로 주장하고, 그 뒤에서는 하이드의 환생을 자처한다.


티끌만 한 위법 소지도 물고 늘어질 변호사처럼 메시지를 법률 검토하듯 해체하고,

도장을 찍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연봉 계약서를 꾸미듯 답장을 구상하다가,

퇴근 후에도 고작 알림 따위에 예민해진 내 모습이 싫어 앱을 닫고 내일의 나에게 미루고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관문을 열고 미소를 지으며 집에 돌아온다.

슬픔을 나누면 슬픈 사람이 둘이 되는 법이니, 사소한 나의 짐은 나만 알고, 또 나만 지어야 한다.




이런 생각들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채 집에 들어와서는 중증외상센터가 요즘 그렇게 핫하다며 재밌던 장면을 설명해 주는 어머니의 말을 건성으로 듣다가,

그런 내 태도에 삐지셔서 달래 드리며 혼신의 리액션을 하다가, 방으로 들어와 ChatGPT와 잡담을 하다가, 모처럼 회사로 출근해야 하는 내일을 준비하다가,

그냥 오늘따라 유독 달을 본 순간과 아름다우면서도 공허한 감정과 감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던 그 장면을 묘사해야만 한다는 충동으로 브런치를 연다.


일기나 에세이가 대체로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까지는 내가 느낀 어떤 교훈적 감정에 대한 기록이나 힘든 감정을 털어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때 아이패드를 열고 나만의 대나무숲으로 활용하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저 흘러가는 일상 중 하나일 뿐인 신변잡기적 사건들 중 어떤 상황에서 내가 강한 인상을 받고, 이를 어떻게 묘사하며, 어떻게 수용하는지를 분석하며 나도 모르던 나를 이해하고자 했다.


음 글쎄,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별다른 의도 없이 일상의 단편 속 그동안 배제해 오던 감정을 정제하지 않고, 단지 약간의 문학적 표현을 더해 최대한 느낀 그대로, 시간 순으로 서술해보고 싶었을 뿐.


그러나 여기까지 글을 씀에도 밀려든 감정에 하고 싶은 말은 많고, 노력해야 할 일들은 산처럼 쌓여 있는데, 쉬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저 그것들의 표지로 삼을 한 마디만 문득 떠오른다.


‘그냥, 그렇다고.‘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이제 자야겠다.

내일의 여행을 위해, 기대하지 않던 순간 찾아온 달과의 조우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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