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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누각

한 번만 더 무너지면 각자 살길 찾아가자

by 슬기

모래 위에 지은 집이 아무리 멋지고 훌륭하다 해도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이다. 솔직히 지금 내 마음이 그렇다. 도박을 했다는 고백을 듣고 나서 마음이 많이 무너졌지만 이 결혼을 그만둘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계속 이 사람과 같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방법을 찾아내려고 여기저기 알아보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도박에 관한 책도 읽고 단도박 모임을 찾아가 사람들도 만나면서 도박의 메커니즘과 실태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제일 처음 알려주는 말이 <도박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말이 도박을 해서 빚을 지고 그 돈을 다 날렸다는 고백보다 더 내 마음이 무너뜨렸다. 희망도 의욕도 다 사라졌다. 내가 옆에서 뭘 어떻게 도와줄 수도 없고 자기 자신조차도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미쳐버려. 어쩌라고. 답답하네....

이 결혼을 계속 유지하는 선택을 하려니 우리가 도박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렵다. 인정하기 싫다. 그러니 자꾸만 내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잘하면 뭐 해? 돈 잘 모으고 성실하게 일하면 뭐 해? 다정하게 잘 지내면 뭐 해? 언제 재발할지 모르는데? 갑자기 무슨 아무 징후도 없이 내 뒤통수를 후려치는데? 사랑한다면서 뻔뻔하게 거짓말하고 속이는데?

내가 이 결혼은 제정신으로 유지하려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한다. 사상누각이긴 한데 아직 안 무너졌으니까 일단은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자. 나는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은 한다. 스피치를 배우러 다니고 도서관에 가고 북클럽에서 활동하고 글쓰기챌린지에 참여하고 라인댄스를 배우고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 이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 근데 확실히 예전만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배신의 순간에 내 마음이 크게 다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사랑하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도 잘 되기를 격하게 응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같은 안전제일주의 쫄보가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사상누각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여기서 지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많이 참아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사상누각에서 불안을 견딘다. 오늘은 안 무너졌으니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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