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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 Sep 28. 2019

<미드 소마>

애써 부정해온 욕망을 기어코 파헤쳐버리는 심리적 호러 영화

-엄습하는 운명-
 
대니는 두 가지 불안을 안고 있다. 첫째는 가족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대니는 조울증을 앓는 동생에게서 꾸준히 불길한 문자를 받는다. 대니는 문자를 보며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받지만, 별일 없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애써 그 예감을 무시하려 한다. 그러나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실현되고 만다. 대니의 동생은 곧 부모님도 자신과 함께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문자를 보내고, 그 날 대니의 가족은 모두 죽어서 대니에게 크나큰 트라우마로 남게 된다. 둘째는 주변 인물의 시선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항상 동생을 의식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대니는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에게 자주 의존했다. 크리스티안은 그런 대니를 부담스러워했고, 크리스티안의 친구들도 대니를 불편해했다. 대니는 친구와 통화를 하며 남자친구가 자신을 싫어할까 봐 불안하다고 토로한다. 크리스티안은 대니가 불안정한 상태일 때 마음 놓고 기댈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불만족스러운 상태로 살아가던 대니는 스웨덴에 있는 펠레의 마을로 가는 크리스티안 일행의 여행에 동참하기로 한다. 크리스티안의 친구들은 여행에 끼겠다며 나타난 대니를 피해 자리를 옮긴다. 대니도 그 사실을 알기에 여행길에 오르는 그녀의 마음 한편이 무겁다. 그런데 모두가 대니를 피할 때 유일하게 대니에게 공감해주고 대니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여행의 주동자인 펠레다. 펠레는 대니에게 공감하고, 그녀를 초대할 수 있어 기쁜 기색을 대놓고 보인다. 그녀와 즐거운 대화를 나눌뿐더러, 자신도 부모님을 잃어보았기에 그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는 둥 그녀의 심부를 자극하는 말까지 한다. 그 말은 부모님에 대한 대니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잔인하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에게 진심으로 공감해줄 사람을 갈구하던 대니의 욕망을 달콤하게 충족시켜준다.
 
<미드 소마>는 예상하기 쉬운 영화다. 이는 <미드 소마>의 서사가 클리셰로 들어차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의 본심을 꾸준히 암시하고 구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전부 알고도 어쩔 수 없이 지켜봐야만 하는 무력감을 선사한다. 마을의 문화를 조사해서 논문으로 쓰려던 조쉬는 마을 경전을 찍기 위해 규율을 어기고 죽는다. 전반부 내내 여자 이야기만 하던 경박한 친구 마크는 수상한 여자를 따라가 죽는다. 여자친구에게서 해방되고 싶어 했던 크리스티안은 마을 여인 마야와 성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해줄 사람을 원했던 대니는 자신을 불편해하던 모든 사람이 거세된 마을의 구성원이 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기 한참 이전부터 등장인물에겐 저마다의 끔찍한 운명이 주어져있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욕망을 향해 내달리지 않는 것은 자라오면서 배운 사회윤리적 통념 때문이다. 크리스티안은 여자친구와의 의리 때문에 마야와 관계를 맺는 것을 주저한다. 대니는 남자친구가 안식처가 되어주지 못해도 남자친구를 저버리고 펠레와 마을을 선택하지 못한다. 윤리적 통념에 어긋나는 자신의 흉한 본심을 짐짓 무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드 소마>는 인물이 어떻게든 모른 척하던 본심을 긴 시간에 거쳐 기어코 파헤치고 만다. 실현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가차 없이 실현되고 관객들은 그 과정을 아무것도 못하고 지켜보아야만 한다. 이때 아리 애스터가 관객의 무력감과 고통을 배가하기 위해 선택하는 연출적 수단은 다가오는 끔찍한 운명의 지연이다. 가령, 절벽에서 노인이 떨어지는 씬에서 관객들은 절벽을 비추는 롱숏과 손을 베는 선혈의 이미지, 절벽 위에서의 아득한 부감 숏을 통해 노인들의 죽음을 예감할 수 있다. 한데 노인들은 바로 뛰어내리지 않고 지독하게 긴 의식의 과정을 밟는다. 한 명이 뛰어내려 죽고, 예감은 확신이 된다. 그런데 노인 한 명이 죽고도 씬은 끝나지 않고, 나머지 한 명이 또 절벽 위에 선다. 심지어 그는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죽지 못한다. 관객이 미리 보았던 망치를 든 사내가 죽지 못한 노인을 향해 걸어간다. 관객의 감정을 끝도 없이 배가하는 짓궂은 장난. 이때 떨어져 죽는 노인을 지켜보는 인물들은 사건에 개입할 수 없는 관객과 같은 처지에 있다. 끔찍한 사건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인물들의 표정이 스크린에 구현된다. <미드 소마>에는 이런 지독한 리액션 숏이 많이 있다. 곰이 불타는 그림을 두 눈으로 보았는데도 아무것도 못하고 곰 안에 들어가게 되는 크리스티안의 눈빛. 곰 탈을 쓰고 자신의 주변을 휘감아오는 불을 지켜보기만 하는 크리스티안의 눈동자. 제물이 된 크리스티안을 지켜보는 대니의 망연자실한 표정. 불타는 신전 안에서 불을 지켜보는 마을 주민.
 
 
-추레한 본심-
 
절벽에서 떨어지는 노인을 본 대니는 충격을 받고 마을을 떠나려고 한다. 그때 펠레가 짐을 싸는 그녀를 잡는다. 펠레는 대니에게 크리스티안은 좋은 녀석이지만, 그가 너에게 안식처가 되어주냐고 묻는다. 대니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펠레는 대니를 이해한다고 말한다. 자신 역시 부모님을 잃었다고, 그러나 자신은 상실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부모님이 죽자마자 마을에 들어와 모두를 가족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미드 소마>의 무대가 되는 마을은 극단적인 파시즘적 매혹을 품고 있다. 그곳에서는 모두가 가족이고 동질적 구성원이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잠을 잘 때도 프라이버시가 없다. 섹스를 하면 옆에서 수많은 사람이 함께 신음소리를 내며 공명(共鳴)하고, 오열을 하면 마을 구성원이 함께 슬퍼한다. 한 사람이 운다고 해서 모두가 함께 땅이 꺼질 듯이 분노하고 오열하는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대니의 트라우마와 결핍을 해소하는 이 부자연스러운 이미지는 과장된 집단 감성으로 가득 차서 기괴하다. 예견된 일이 거의 다 일어난 후에 대니는 결국 크리스티안을 저버리고 펠레와 키스를 한다.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가족을 얻었다. 미소를 짓는 그녀의 해괴한 모습. 저마다 내밀한 욕망을 품고 있는 관객들은 그런 부류의 욕망이 이미지로 생생하게 새겨지는 것을 보고 섬찟함을 느낀다. 그 순간 관객이 느끼는 것은 자신의 추레한 본심이 간접적으로 파헤쳐지는 듯한 공포스러운 감각이다. <미드 소마>가 우리에게 끔찍하게 와닿는 것은 말초적 공포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 부정해온 욕망이 끝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심리적 공포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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