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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민 Sep 28. 2019

<원더풀 데이즈>

예술은 설파가 아니다.

우리는 구구절절한 대사가 없어도 시각적 스토리탤링을 통해 충분히 감정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월E>를 통해 알 수 있다. <원더풀 데이즈>에서 돋보이는 부분들 역시 복합적인 저의를 도려내고 감정의 정수를 여과해낸 시퀀스들이다. 제이가 오토바이를 타고 첫사랑인 수하를 쫓아 자욱한 안개 속을 달리는 시퀀스는 적절한 ost와 배합되어 그들의 아련한 감정을 뼈저리게 자아낸다. <카우보이 비밥>에서 에드가 일행을 떠나가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시퀀스는 대사가 없지만 몽환적인 ost와 자욱한 안개, 인물들의 표정만으로도 풍성한 감정을 표현한다. 마침내 마르를 불태우려는 에코반의 음모를 저지하고 구름이 걷히는 장면도 황홀한 감정과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출중한 시각적 쾌락에 비해, 이 영화의 내러티브는 너무 빈약하다. 플롯은 단순하고, 철학을 다루는 필치는 수박 겉핥기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캐릭터들은 지나치게 평면적이다. 시몬과 수하, 제이에게는 그들만의 성격과 개성이 부재되어 있고, 그들의 관계에는 각자의 입장과 사연만이 존재한다. 이 영화의 방점은 내러티브에 있지 않다.
 
이 영화에는 환경 문제나 쇄국 정책, 계급 체계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지만, 정작 기득권층에 있던 주인공 ‘수하’가 혁명가로 변모하게 된 것은 견고한 정치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찰나의 순간에 드러나는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이었다. 제이와 함께 쟂빛 구름 사이로 드물게 드러나는 푸른 하늘을 목도한 수하는 하늘을 보았던 그날을 ‘원더풀 데이즈’라고 부른다. 수하에게는 영화에 등장하는 온갖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도, 이 ‘원더풀 데이즈’를 다시 불러오는 것이 결정적인 숙제였다. 말하자면 <원더풀 데이즈>는 텍스트보다는 강렬한 시각적 체험의 위력에 기대는 영화다.
 
흑인 노예 제도에 대한 그 어떤 논리적인 설파도 흑인 노예 제도에 관한 영화만큼이나 그들의 비애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줄 수 없다. <원더풀 데이즈>는 녹색성장을 위한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환경을 보호해야 할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맥락을 정확히 구사하고 설득하는 대신 자연의 숭고함을 그려내는 데 열중한다. 끝내 푸른 하늘이 드러나고 햇살이 대지를 덮는 <원더풀 데이즈>의 마지막 시퀀스는 자연의 가치를 관객들의 감성에 직접 호소한다. 관객들은 화사한 하늘과 찬란한 햇살을 보며 황홀경에 빠질 때, 마침내 자연의 소중함을 진심으로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까, 주제를 설파하는 데 있어서 논리적 세공력만이 중요한 요소인 것은 아니다. 예술의 숭고함은 감정을 자아내는 모든 미적 가치에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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