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도.
말간 하늘을 올려다보니 저절로 눈이 감긴다. 보지 않아도 냄새 맡지 않아도 느껴지는 '제주'.
겨울이란 날씨에 무색하게도 제주의 바람은 벌써 봄기운을 품은 듯 따뜻하다. 코끝에 살랑이는 바람이 그저 보드랍다.
일상을 벗어났다는 이유가 이렇게도 신날 일이던가? 서로의 눈빛만 마주쳐도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토록 바라던 곳으로 여행을 온 딸아이는 쉴 새 없이 '행복하다'라는 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여행 전부터 온 가족이 둘러앉아 여행 계획을 짜면서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다니자'라고 계획했다.
서두르지 않기로... 계획한 데로 여행일정이 뭉그러져도 괜찮다고...
앗, 또 한 가지. 핸드폰 디톡스를 결심했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약속이었다. 최대한 핸드폰과 거리두기!
작년에는 여행 중에도 매일 글쓰기를 이어가기 위해 블루투스 키보드부터 챙겼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나에게 주고 싶었다. 쇼펜 하우어도 "가끔은 책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매일 읽고 쓰는 것을 목표로 하던 나였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약간은 강박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다. 쓰기 위해 읽고, 읽기 위해 쓰는 일을 반복하며 쉬지 않고 유튜브 영상이나 강의를 들었다. 운전할 때도 집안일할 때도 하물며 목욕할 때도 나는 넘쳐나는 정보와 지식을 머릿속에 무언가를 강제로 집어넣으려고만 했다. 무조건 많이 듣고 읽고 쓰는 것만이 최선인 줄 알았던 나에게 '쉼', 아니 '비움'이 필요했다. 습관적으로 챙겨간 책 한 권도 어느새 캐리어 깊은 곳에 처박아 두었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 하지 않고 먹고, 놀고, 자는 일.
"Simple is best"이란 말처럼 단순해지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제주의 햇살이, 제주의 바람이,
제주의 바다가
제주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맛있다고 느낄 수 있어 감사했고,
좋은 것을 함께 누릴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했다.
사소한 모든 것들의 행복을 마음속에 오롯이 담을 수 있어 이 또한 감사했다.
우연히 지나쳤던 김밥집 상호명이 "햇살 머금고 바람 한 모금"이었다. 무척이나 이쁘고 다정한 이 이름을 나는 몇 번이고 되새기며 마음에 그렸다. 이런 사소한 것에도 마음껏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내가 퍽 마음에 들었다.
어떤 것에 반응하고 좋아하고 행복해하는 지를 알아가며 나는 나와 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