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0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취재기
버스가 군사분계선(MDL)을 넘었다. 한 시간 가량 더 달리니 임시 천막이 보인다. 북측 출입국 사무소(CIQ)다. 버스에서 내려 입국심사 줄을 서니 무장한 군인들이 곳곳에 보인다. 취재진 29명의 짐을 검사하는데 노트북 파일 하나하나를 모두 열어본다. 남측 취재진의 업무용 노트북을 전수 검사한 것은 지난 19차례 상봉 가운데 전례 없던 일이다. 예정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넘게 지체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가운데 함께 온 취재기자의 노트북이 압수됐다. 파일에 저장된 기사 중 하나를 트집 잡은 것이다. 북측 심기를 건드린냥 검사관의 눈매가 매섭게 돌아갔다. 이번 취재가 만만치 않을 거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동포 여러분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의 스피커에는 익숙한 노래 ‘반갑습니다’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테이블에 있는 가족들의 표정은 쭈뼛쭈뼛하다. 내가 생각했던 첫 상봉의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북측 가족들은 “위대한 원수님”을 언급하며 체제 선전하기 바빴다. 심지어 ‘김일성 표창장’, ‘노동대회 참가장’ 등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자랑을 이어갔다. 이번 방문단 96가족 중 부부나 부모 자식 간 상봉은 5건뿐이다. 직계가족의 부재로 인한 간절함과 동질감이 없고 북한 보장성원(지원요원)의 감시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다.
취재환경은 상당히 열악했다. 방송국으로 영상 송출할 수 있는 인프라가 없었다. 인터넷은 연결되지 않았고, 국제 전화선이 남쪽과 연결된 통신의 전부였다. 촬영한 원본 영상은 외교 행낭을 통해 고성 남북출입사무소 중계차로 하루 4차례씩 배달됐다. 편집할 시간이 없어 중계차에서 원본 카드가 플레이되는 순간 ‘ON AIR’ 돼야 한다. 공동취재단으로 온 만큼 영상기자들은 약속을 했다. 방송 진행 앵커들이 가족들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에 테이블 가운데 있는 가족 번호표가 나오게 찍기로 했다. 상봉 모습은 스케치 성이 아닌 목소리 위주로 호흡을 길게 두고, 영상 중간에 블랙과 컬러바가 없게 찍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북한이 남측으로 배달되는 행낭에 트집을 잡았다. 행낭 속 촬영 영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외교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시간이 지연돼 첫 상봉을 방송하기로 계획된 낮 뉴스특보에 영상은 나가지 못했고 저녁 메인뉴스에 가까스로 방송할 수 있었다.
둘째 날 단체상봉 시간. 개별상봉을 포함해 총 세 차례의 상봉이 있었다. 첫날과는 다르게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웠다. 취재기자는 노트북 압수 문제로 조사를 받아 혼자서 취재에 임했다. 한쪽 테이블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모습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카메라 렌즈를 향했다. 66년 만에 만난 리흥종 할아버지(88)와 딸 이정숙 씨(68)다.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테이블 위로 올리자 북한 보장성원이 갖다 대지 말라며 치웠다. 이번 상봉에서 북한의 최고령이자 가수 출신이기에 취재를 방해하며 더 경계했다. 기지를 발휘해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딸에게 직접 쥐어줬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남한으로 가면 아버지 소리를 못 듣잖아요. 이 소리를 내가 집에 가서 들을 거니까 아버지가 노래 한 번만 해주세요." 아버지는 딸의 부탁에 ‘애수의 소야곡’과 ‘꿈꾸는 백마강’을 불렀다. 이 노래는 모든 방송사 메인뉴스에 ‘눈물의 망향가’라는 제목으로 방송되었다.
다른 한편에선 북측 상봉자 리한식(87) 할아버지가 A4용지에 연필로 정성스레 뭔가를 그려나간다. 자신이 의용군으로 끌려가기 전까지 살던 초가집의 모습이다. 리 할아버지는 목에 걸었던 이름표를 벗어 자 대신 쓰면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초가집을 그려나갔다. 초가집의 기둥과 담벼락, 초가의 음영, 마루의 무늬, 댓돌까지 생생하게 그렸다. 그림 아래에는 '상봉의 뜻깊은 시각에 그린 이 그림을 종인 동생에게 선물한다. 2015.10.21'이라는 문구가 적혔다. 남측 동생 이종인 씨는 "두 시간이 참 아까운 시간이지만, 형님의 마지막 선물이 될 수 있으니까…." 하며 눈물을 훔쳤다.
"굳세게 살아야 해… 마음 든든하게 하고"
여섯 번째 만남. 마지막 작별상봉이다.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소리칩니다. 안녕히 다시 만나요.” 상봉장에 ‘다시 만납시다’ 노래가 반복해서 나온다. 작별상봉 시간이 10분 남았다는 안내 방송. 마음이 급해졌다. 여든이 넘은 누나를 안고 테이블 주변을 도는 할아버지. 부둥켜안고 인사하는 가족들. 또다시 긴 이별을 해야 하는 가족들은 서로의 손을 놓지 못했다. 어제 아버지께 노래 선물을 받은 이정숙 씨는 체크무늬 손수건 두 장 중 한 장을 아버지에게 건넸다. "이 수건 아버지하고 나하고 나눠 갖는 거니까 잘 간직하셔야 돼요"하며 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 울었다. 이내 뷰파인더는 흐려졌다. 냉정함을 찾으려 노력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리 할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잡으며 "굳세게 살아야 해… 마음 든든하게 하고"라고 당부했다.
북측 가족들이 먼저 버스에 올라탔다. 어렵사리 가족을 찾은 상봉자들은 버스 창 사이로 손바닥을 마주대고 “건강하래이”, “사랑해”, “곧 또 볼 수 있을 거야”를 외쳤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흐른다. 긴 헤어짐을 앞둔 이들 앞에서 카메라를 꼭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남측 가족들이 버스 창을 열려고 하자 북측 보장성원이 감기 걸린다며 창을 닫았다. 가족들은 다시 창문을 열고 언제 잡을지 기약할 수도 없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토해냈다. 북한 보장성원들도 처음에는 예민한 모습이었지만, 버스 창 하나 사이로 남북의 가족이 갈라선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 보장성원은 주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계속 흐르는 눈물을 휴지로 닦아내며 어렵사리 감정을 추스르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카메라를 내려놓은 나는 한동안 벽에 기댄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뉴스 영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카메라는 차가운 기계일 뿐이다. 하지만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렌즈의 시선은 영상기자의 눈으로 재단된다. 결국 뉴스 영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이다. 영상기자의 냉철하지만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다. 보기 좋은 영상만으로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