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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비친눈 Dec 27. 2018

떠나간 사랑을 위한 노래

첫 번째 재즈 이야기 : I wish you love

Jazz Memory #001


곧 있을 거대한 이벤트에 대한민국 전체가 빛나는 붉은빛으로 물들어갈 2002년이었지만, 그 해 이른 겨울만큼은 겉으로 드러난 아픔과 속으로 침전된 외로움에 휩싸여 잿빛 추억으로만 내게 남아있다. 몇 안 되는 그 해 컬러풀한 기억의 잔상 속에는 환하게 남겨진 그녀의 얼굴과 함께 따뜻한 보사노바 멜로디 위에 차분한 목소리가 얹힌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가 흐른다.


마음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던 어느 날, 영화 한 편 보았다. <와니와 준하>. 예쁘고 멋진 배우들보다 눈에 들어왔던 건 화사하게 울창한 여름, 그 속에 이야기를 품었던 집, 이제는 보기 힘든 야트막한 주택가 동네 어귀, 그 동네 사이사이 예쁜 집으로 가는 골목길,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음악이었다. 그 속에서 꽁냥꽁냥 거리는 만화 같은 내러티브는 실패한 수험생의 마음을 괜히 건드렸고, 먹먹한 마음 한 구석에 여운이 남아 영화의 주제곡을 이내 검색했다. 그때는 지금보다 무지했고 잘 몰랐기에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는 내겐 재즈로 듣게 된 계기가 되었고 보사노바를 사랑하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첫사랑 같은 곡이 되었다. 친구 하나가 그랬었다. 사람의 인생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를 닮아가게 된다고. 그래서 그랬을까. 보사노바의 리듬처럼 밝고 정겹고 흥겨운 따뜻한 일상들도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애틋함만 남긴 채 나를 떠나갔다.


아직 CD 플레이어가 익숙했던 그 시절, 나는 그렇게 리사 오노의 음악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겨우 곡 하나에 이끌려 덜컥 음반매장에서 집어온 그녀의 베스트 앨범은 그렇게 내 스무 살을 지배했다. 잔인했던 겨울이 지나 봄이 스멀스멀 다가올 무렵부터 나는 격주마다 한 번씩 울산과 부산을 오갔다. 대입은 스무 살 그 나이 또래 아이들에게 중요했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시 얻은 한 번의 기회를 더 '단디'하기 위해 부산에 마련된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만 했다. 하지만 스무 살 어리고 여렸던 마음이 어디 그리 쉬웠을까. 서울로 떠나간 짝사랑에게 뭐라 말도 못 걸어본 채 좌절감과 패배감을 안고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127번 버스 안에서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리사 오노의 맑고 따뜻한 음색에 스스로를 괜찮다 괜찮다 달래어주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127번 버스가 안내하는 그 도로 위에는 푸르름이 있었다. 봄이 지나 여름으로 갈수록 녹음은 더욱 짙어져 청년의 마음을 설레게 해 주었다. 도로가에는 벚나무와 느티나무가 번갈아 펼쳐져 지나가고 그 사이로 보이는 들판에는 투명한 빛의 고인 물 사이로 연둣빛 어린 생명이 빼꼼히 얼굴을 드러냈다. 버스가 지나는 도로 중간에는 고운 여인네의 곡선을 빼닮은 아름다운 능선 사이로 강렬한 원색의 모자를 쓴 시골 촌부의 집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병풍처럼 마을을 품은 산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서 있었다. 평범하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보는 한 시간 남짓 동안 나른한 여자의 목소리가 유려하게 흐르는 보사노바의 멜로디를 따라 귓가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고 사랑의 성장통을 앓았던 어린 남자는 부드럽게 감싸는 그 느낌에 위안받았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처음이 어려울 뿐 머릿속에서만 그린 두려움을 견뎌내면 그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 되고 이후로는 모든 게 처음보다 쉬워진다. 그리고 이내 당연해진다. 나도 그랬다. 이제는 어렴풋하게만 기억나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감 안나는 저 먼 옛이야기의 잔상으로만 남아있고 그 속에 흘렀던 아름다운 음악은 고향 집의 오래된 장롱 속 사진첩에 꽂혀있는 인덱스처럼 언제든 옛 추억으로 나를 인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여행지에서, 카페에서, 사무실에서, TV 프로그램에서 <I wish you love>가 흘러나오면 풋풋했던 어린 시절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2년 전, 타이베이 단수이 강변의 어느 카페에서도 타지에서 만난 낯선 여자분과의 즐거운 대화 중 이 노래가 살며시 들어왔다. 잠깐이나마 움찔한 내 표정을 읽은 그녀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 미안해요. 지금 이 노래 제가 정말 좋아하거든요. 전 지금이 너무 좋은데 좋아하는 음악까지 나오니 기분이 너무 좋네요."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무슨 노래예요?"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이어나갔고 하늘이 서서히 붉게 노을질수록 나도 그녀도 좋은 감정이 더해갔다. 그녀와의 관계는 이후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이 노래의 섹션에는 또 다른 감정과 추억이 더해졌다. 어쩌면 섬뜩하게도 빌어먹을 내 친구 녀석의 그 말이 예언처럼 되었지만, 이 노래의 타이틀처럼 나는 내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의 행복을 바란다. 나와 길게 아니면 짧게 만났든지, 혹은 사귀었든지 아니면 썸만 탔었든지, 어쩌면 상처주었든지 아니면 상처받았든지 이제와서 그건 아무 상관없다. 시간이 흐르면 모든 나쁜 것들은 빛바래지고 좋은 기억과 애틋한 감정만이 필름 카메라의 사진처럼 남아 내 마음에 수놓아 주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기억 앨범에는 음악 별로 기억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각 음악은 저마다 다른 기억과 감정을 품고 있다. 제일 빛바랫지만 풋풋하고 소중한 첫 장,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이다.




Song Introduction


<I wish you love>는 꽤나 오래된 재즈 곡으로 구글, 유튜브 등을 찾아보면 여러 가지 버전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재즈 명곡들이 그렇듯 이 곡에도 멜로디와 가사 사이에 느껴지는 감정선의 차이가 있다. 편곡 버전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멜로디는 따스하다. 그렇지만 그에 비해 가사는 떠나간 연인의 행복을 바라는 내용으로 멜로디와 상반되어 애처롭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이별 직후 이 곡을 듣는 것은 매우 해롭다.


개인적으로 이 노래의 두 가지 버전을 추천한다.


리사 오노와 백예린.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는 내게는 첫사랑과 같은 추억이 담긴 애틋한 버전이지만, 백예린의 <I wish you love>는 현재 나의 이상형 같은 매력적인 버전이다. 그렇다고 백예린이 이상형이란 건 아니다. 참고로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는 영화 '와니와 준하'를 배경으로 한 영상을 선택했는데, 이 영화의 무대가 되는 집은 후암동의 '지월장'이라는 곳으로 현재는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영화 배경이 아름답고 정겨워 가져왔다. 그리고 백예린의 영상은 18년 서울 재즈 페스티벌에서 부른 버전을 가져왔는데 들을 때마다 느끼지만 이렇게 실력이 좋고 매력적인 가수의 음반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빌어먹을 제왑삐. 트와이스 빼고.


리사 오노의 <I wish you love>


백예린의 <I wish you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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