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달비친눈 Dec 31. 2018

지친 나를 위한 위로

두 번째 재즈 이야기 : I'll close my eyes

Jazz Memory #002


10월 초였다. 후덥지근했던 여름이 막 지나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자 그곳이 생각났다.


'클럽 에반스'


학부 4학년 무렵부터 공부에 지칠 때면 마음 맞는 친구들이나 후배들을 꾀어 학교에서 제일 가까웠던 그 재즈 바 클럽 에반스로 데려갔다. 그곳엔 매일 저녁마다 바 전체를 가득 채우는 훌륭한 연주자들의 라이브가 있었다. 재즈는 잘 알지 못했지만 음악 자체가 그저 좋았던 우리들의 어깨는 피아노 선율 사이사이의 리드믹컬 한 드럼 소리에 박자를 맞춰 들썩였고 웃음이 서로의 입가로 번져갔다. 그렇게 재즈 선율을 함께 즐겼던 우리들은 졸업을 기점으로 행동반경이 한강 이남 이곳저곳으로 흩어졌고 자연스레 우리의 만남도 연락도 뜸해졌다. 그렇지만 그때 함께 웃었고 음악을 즐겼던 좋은 기억은 간간이 머릿속에 떠올라 내 발걸음을 다시 그 재즈바 클럽 에반스로 옮기게 한다. 10월 초 그때가 그랬다.


충동적인 이끌림에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익숙한 목재 문 앞이었다. 문을 밀어 본다. 살짝 밀었는데 문은 올 걸 알았다는 양 쉬이 열렸다. 문이 열리는 그 찰나의 순간, 내 몸은 생기 넘치고 활기찬 홍대에서 갑자기 어둠에 숨겨진 한 고요한 안식처로 이동한다. 입구 앞에 몇 초 간 멈춰 섰다. 갑작스레 맞이한 이질적인 세계에는 또렷이 보이는 빛나는 무대와 무대의 빛 아래 숨어있는 좌석들, 그리고 나보다 일찍 와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연인들이겠지. 그 날은 월요일이었다. 그럼에도 재즈 바엔 사람들이 꽤나 북적였다. 한글 창제한 세종대왕의 은덕에 하루 건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이들이 금요일 밤처럼 모여든 탓이었다.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클럽 에반스의 월요일과 화요일은 신출내기 연주자들을 위한 Jam day이다. 이 날은 여기저기서 모인 연주자들이 곡마다 밴드 구성을 바꿔가며 즉흥적으로 악보 없이 연주한다. 연주자 서로가 대부분 면식만 있고 친한 경우가 드물어서 일단 밴드가 구성되면 바로 연주로 들어간다. 그래서 이 날 연주된 곡들은 배려와 눈치, 센스, 애드리브, 그리고 경쟁이 암묵적으로 곳곳에 포진되어 연주되는 동안 쉴 새 없이 무대를 꽉 채운다. 그래서 로또 같다. 연주자 개개인의 실력도 차이가 드러나지만, 개개인의 성향, 밴드의 조화, 애드리브 타이밍, 연주자의 기분, 그리고 관객 분위기 등에 따라 같은 곡이라 할지라도 느낌이 완전 달라진다. 그래서 무대 완성도는 다른 요일의 전문 밴드에 비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난 이런 재즈 즉흥 연주를 좋아한다. 다룰 줄 아는 악기는 없고 전문적인 음악 지식도 없지만 재즈 특유의 자유로운 느낌과 순간순간의 조화, 서로 주고받는 그 호흡이 너무 좋다. 그리고 이 날 울려 퍼지는 곡들은 이미 재즈 명곡 반열에 오른 음악들이기에 완성도를 떠나 대체로 좋다.


몇 곡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혼자 온 터라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무명 연주자들의 즉흥 연주를 흥겨이 즐겼다. 그리고 무대 진행자의 소개가 끝나자 곡 하나가 울려 퍼졌고, 난 아래로 내린 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드럼은 적당한 템포와 타이밍으로 사람들의 어깨를 흔들게 만들었고 피아노는 흑백의 건반이 만들 수 있는 부드럽고 예쁜 음색을 바 전체로 퍼뜨렸다. 베이스는 그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무게를 더하면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충실히 내었다. 즉흥이었음에도 세 연주자들은 상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중간중간 주고받은 눈짓을 음악에 새겼다. 분위기에 취해 마음에 충실한 나머지 곡명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연주가 끝나자 이상형을 만났는데 미모에 압도되어 미처 번호를 딸 생각 못한 쭈글이처럼 아쉬워했다. 그래도 영상은 다행히 남겨 한동안 그 아름다운 미모(?)만은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올해 클럽 에반스의 마지막 방문에서 나는 결국 그녀의 이름을 마침내 알게 되었다.


<I'll close my eyes>


헛웃음이 나왔다. 기뻤지만 슬펐다. 뒤늦게 제대로 알게 된 것이 기뻤고, 곡 명이 절묘하게 내 모습을 대변해주어 슬펐다. 연말은 가열차게 갈수록 내게 잔인해졌고 나는 정말 그런 현실에 질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와 함께 해주는 이들이 있고, 홀로일 때도 눈을 감으면 이 곡은 마음속에 울려 퍼져 내 들끊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준다.   


Super Jam Day on Oct. 8th @ Club Evans





Song Introduction


<I'll close my eyes>는 재즈 트럼페터 블루 미첼이 만든 Quartet의 첫 앨범 "Blue's moods"에 수록된 첫 번째 곡이다. 고백하자면 이 곡을 듣기 전까지는 이 트럼페터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블루 미첼을 알고 나서야 트럼펫의 매력을 실감하였다. 물론 마일스 데이비스나 쳇 베이커를 좋아하긴 하지만, 개별 곡 자체를 좋아할 뿐 트럼펫이 매력적이어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달리 말하면 블루 미첼의 연주가 굉장히 내 스타일이었다. 사실 소개 곡 <I'll close my eyes>의 첫인상이 내게 워낙 컸고, 요즘 위안이 필요해 많이 자주 듣는다. 이 곡은 대체로 경쾌한 트럼펫과 발랄한 피아노, 아늑한 베이스의 조화가 매력적이라는 평이며, 개인적으로도 그런 매력이 지친 일상에 위안을 얻기 좋다는 생각이다.


위 에세이에 첨부된, 본인이 직접 찍은 영상은 피아노 트리오로 연주된 버전이다. 원곡과 비교하면 트럼펫이 빠져있어 청명한 경쾌함은 덜하지만 오히려 트럼펫이 빠진 자리를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잘 채워줘 쉽게 이 아름다운 멜로디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저 한 재즈를 좋아하는 일반인의 견해로 이 버전은 어떤 면에선 원곡의 트럼펫 Quartet 연주 버전에 비교해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차분해서 더 우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관심 없겠지만 잘 들어보면 영상 중간에 내 감탄이 살짝 오디오에 섞여 들어가 있다. 흥이 난 여자 목소리는 나와 관계없다.ㅠㅜ 덧붙여 Jam day라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세 연주자분들께 이 글을 통해 좋은 연주 들려줌에 감사함을 표한다.




작가의 이전글 떠나간 사랑을 위한 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