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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비친눈 May 03. 2019

내 여행 북마크가 되준 음악들

일곱 번째 Pop 이야기: あなたのそばに/내게 돌아와/Wanderlust

Pop Memory#007


여행은 그 자체로 설렌다. 항공권 예매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내적흥분은 하루가 지날수록 나도 몰래 서서히 커져간다. '거기선 무슨 일이 생길까', '어떤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게 될까', '무슨 추억이 생길까', '그 곳은 어떤 인상으로 내게 남을까' 등등 겉으로는 기대 안한 척 의연하더라도 마음은 연애하듯 설레임에 풍선 마냥 부풀어간다. 출국심사 마치고 면세점이 늘어선 공항 탑승동 라운지로 들어서면 최고조에 이른다. 그러다 비행기에 탑승할 때쯤이면 일말의 묘한 긴장감이 불현듯 나타난다. 조용하던 기내가 비행기의 소음과 흔들림으로 가득차기 시작할 무렵 긴장은 두려움을 데려 온다. '빼먹은 거 없나', '미처 알아보지 못한 중요한게 있을까', ‘집 정리 단디 했겠지?’ 등등 별의 별 잡생각이 든다. 그러다 괜한 걱정을 떨치려 비행기 좌석에 부착된 멀티미디어 기기를 켜본다. 내 여행의 북마크는 종종 거기에서 나왔다.


2007년 6월 유럽 배낭여행 - Crystal Kay, 'あなたのそばに'

JAL(일본항공)을 탔었다. 도쿄 하네다 공항을 경유해 영국 런던 히쓰로 공항으로 여행의 서막을 시작할 첫 해외여행이었다. 같은 과 절친과 함께 갔었는데 어떻게 해야 좋고 편한지는 아무것도 모른채 일단 싼 항공권을 하나 골라 예약했었다. 그래서 항공권이 들어갈 돈은 줄였지만 대가로 시간을 허비해야만 했다. 비행기 일정 상 런던행 비행기는 새벽 6시에 출발했다. 그래서 두 녀석은 도쿄 하네다 공항 부근 JAL이 제공하는 호텔에 반강제로 묵어야만 했다. 지금은 애초에 그런걸 고려하지도 않았겠지만 그때는 잘 몰라서 서툴렀다. 다행히 시간은 많았다. 대학생의 유일한 장점이 아닐까. 게다가 숙박이 무료 제공이기도 했고 해외여행 자체가 처음이라 일본에서의 첫 하루도 설레임 하나로 괜찮았다.


 모든게 낯설고 신기했지만 새벽부터 일어나 탑승한 기내에서 11시간 남짓 걸리는 비행시간은 심히 힘들었다. 잠도 잘만큼 자고 오락거리 할만큼 했더니 더이상 할게 없었다. 머라도 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이 오자 나는 리모콘을 조물락거리며 JAL이 제공하는 음악을 죄다 틀었다. 그때 처음 나온 음악, 바로 Crystal Kay의 'あなたのそばに'(이렇게나 가까이에서)였다. 이후 그렇게 알게 된 Crystal Kay의 음악에 귀기울였지만 이 노래만큼 인상깊은 노래는 없었다. 강렬한 그녀의 목소리 만으로 포문을 여는 이 노래의 도입부만 들어도 '나는 어디인지 모르지만 신나고 즐거운 곳으로 떠나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온 몸에 도파민이 돌았을 정도였다. 덕분에 장시간 비행과 시차로 인한 피로를 여행 첫 날부터 잘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이 노래를 듣으면 해외로 처음 나갔던 그 날의 설레임과 흥분이 떠오른다.


Crystal Kay, 'あなたのそばに'


2014년 10월 싱가포르/말레이시아 - 클래지콰이, '내게 돌아와'

건장한 남자 셋이 쿠알라룸푸르행 에어아시아 비행기에 탑승했다. 온갖 잔머리를 굴렸지만 끝내 실패했다. 편하게 가려고 옆 좌석을 비게 만들 술책이 무색하게 우리 셋 옆이 비는 일은 전혀 없었다. 별 수 있나. 밀봉된 비닐을 괜히 화풀이하듯 뜯고 헤드셋을 머리에 씌웠다. 에어아사아가 제공하는 영화를 뒤져봤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별 수 없네. 잠이라도 잘까해서 헤드셋을 벗는데 기내는 이미 시장판처럼 소음이 가득했다. 이 소음보단 음악이 내겐 ASMR이 되어줄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내장된 모든 음악을 틀었다.


한 세 시간 잤을까? 눈이 절로 떠졌다. 아침 출발 비행기라 잠은 보통은 세시간 정도면 충분했겠지만 전날밤 장염으로 응급실 다녀와 거의 한숨도 못잤던 나는 잠이 더 필요했다. 여행 전날 장염이라니 오지게도 재수없네. 그렇게 생각하며 잠드는데 귓가에 왠 가사가 울린다


내게 돌아와 내게 돌아와 내게 돌아와 다시 돌아와

바로 깼다. 뭐야 이 노래는. 눈을 떠 화면을 바라보니 클래지콰이의 '내게 돌아와' 였다. 아 뭔데. 어쩌라고. 난 아니라고. 성질이 났다. 잠도 부족하고 장염에 속이 텅 비어 허기에 죽을 지경이니 더 했다. 옆을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물 한잔 요청했다. 찬물 마시고 차라리 정신차리련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한국 영화 한 편을 틀었다. 그때는 몰랐다. 싱가포르에서 돌아온 그 주 주말에 헤어진 그녀와 다시 만나게 될 줄은.


클래지콰이, '내게 돌아와'


2017년 9월 두바이/모로코/세비야 - 크러쉬, 'Wanderlust'

돈은 상관없었다. 어떤 곳인지도 상관없었다. 아무 불빛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 누워 멍하니 밤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흐르는 은하수를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10년 전 배낭여행 중 적었던 일기에서 나는 잊혀진 버킷리스트의 한 조각을 발견했다. 마음 한 구석에 일어난 불길이 겉잡을 수 없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2007년 6월 27일 수요일

(중략)
영국에서 교환학생을 한다는 두 형들은 여러 곳을 다녔노라며 자랑을 해댔다. 학생 신분에 명소든 숙박이든 어디든 큰 욕심만 안내면 돈이 별로 안든다면서 부러운 얘기만 족족 찝어 애기했다. 맥주 몇 캔과 보드카 섞은 칵테일 몇 잔에 취기가 올랐지만 이세계의 별천지 얘기로 정신줄만큼은 고이 붙잡고 경청했다. 나는 물었다.

'형, 그럼 어디가 가장 좋았어요?'
'이집트. 이틀동안 사막투어 갔는데 말야 그거만큼 기억에 강렬히 남는게 없었어. 갑자기 모래바람에 죽을뻔해서 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 날 사막에 누워 바라본 밤하늘이 너무 생생히 기억나. 수많은 별들이 선명히 빛나고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알기도 힘들었어. 게다가 은하수는 정말 아름다웠어. 왜 서양애들이 은하수를 Milky way라 하는지 알거 같았어. 아마 죽을때도 떠오를거 같아.'
'사막이 그렇게 좋았어요?'
'야, 장난 아냐. 술취해서 하는 소리가 아냐. 언젠가 너도 꼭 가봐라. 물론 이집트가 아니어도 모로코나 두바이, 몽골 이런데도 사막은 있으니까 은하수와 별들을 선명히 볼 수 있어. 그리고 유럽에서 이집트나 모로코행 비행기는 얼마 하지도 않어. 정말 사막에서 밤하늘을 볼 가치는 충분히 있어.'


이집트. 민주화 바람불고나서 아직까지도 치안이 안좋다지? 여긴 제외.

몽골. 안끌려. Next.

두바이. 아무리 사막에 간다해도 여긴 두바이랑 사막 이거 둘 밖에 없을거 같은데.

모로코? 이슬람이긴 하지만 이정도면 유한 편인데다 스페인이랑 가까워 함께 가기 괜찮겠네.


아이폰을 들어 바로 카사블랑카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자정 넘어 출발한 비행기 안은 다소 소란했다. 시끄러운 기내 소음에 여행객들의 대화 소리가 더해져 몸은 피곤했지만 쉬이 잠이 들지 않았다. 하던 대로 에미레이트 항공이 제공하는 음악들을 죄다 틀었다. 음악은 ASMR이 되주었고 소음은 음악에 파묻혀 어느새 내 눈꺼풀이 감겨졌다.

자다 깨다 몇 차례 반복하니 고도는 점차 낮아지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저멀리 아부다비의 불빛들이 보였다. 하루 중 가장 깊은 어둠에 잠겨진 시간에도 석유로 만들어진 도시는 아름다운 밤하늘마저 질투해 돈으로 산 듯 밝은 주황빛 가로등을 별처럼 수놓고 있었다. 깊은 밤 사막에 새겨진 문명의 풍경에 때마침 크러쉬의 'Wanderlust'가 흘렀다. 사막의 밤하늘을 보기 전에 기내에서 맛본 새벽 아부다비의 풍경은 그 여행의 서곡이었다.


Crush, 'Wanderl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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