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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비친눈 Sep 13. 2019

T의 이야기

Music: Sam Kim - It's you

Essay#21

# 2010년 7월 어느 날

- 저... 형 집에서 자고 가도 돼요?


갑자기 걸려온 T의 전화에 당황했지만, '그래라' 하며 답했다. 짧은 통화가 끝나자 서둘렀다. 책상 위에 어지러히 널린 형형색색 주석 달린 논문들을 책 사이에 꽃아 두고 모니터 위로 띄워진 창들을 하나씩 닫았다. 컴퓨터가 잠들자마자 연구실 사람들에게 짧게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학교는 조용했다. 최소한의 불빛 만이 건물과 나무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 풀내음 자욱한 교정을 걸으며 여름을 느꼈다. 곧 정문에 이르렀고 나지막한 돌담에 앉아 T를 기다렸다.


- 형!


거나하게 취한 T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으... 술냄새. 녀석. T의 눈을 보았다. 다행히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래도 더 마시면 훅 가버릴 태세(?)였다. 한 잔 하자 조르는 녀석을 달래 바로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T는 내가 던져준 수건 하나를 든 채 욕실에서 나왔다. 바닥에 깔린 요를 보더니 쭈글 대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술 깼나 보네, 녀석. 피식 웃었다.


- 맥주 한 캔은 괜찮지?

- 네.


건네준 오백 한 캔 받으며 T가 멋쩍게 웃었다.


- 근처에 W도 있는데 왜 나한테 연락했어?

- 형 보고 싶어서요. (나:미친...) 그리고 형한테만 털어놓고 싶은 얘기도 있고요."


'형한테만'이란 단어에 내 왼 눈썹이 올라갔다.

T에게는 연상의 여자가 있었다. 이야기 내내 녀석이 이래저래 포장했지만 그리 순진한 여자가 아니란 걸 금방 알아챘다. 그녀는 T의 마음을 알면서 갖고 노는, T는 이른바 '그녀'란 수족관 속 물고기 중 하나였었다. 얼마 안 되어 그녀는 연상의 직장인과 연인이 되었다. T도 그리 바보는 아니었기에 이내 마음을 접었더랬다. (나: 접는다고 접히면 그게 마음이냐? 종이 쪼가리지.) 그랬던 그녀가 얼마 전 헤어졌단 소식을 T가 듣게 되었다. 혼란한 마음에 친구들과 술 마시다 차마 뻔히 비난받을 그 미련 섞인 얘기를 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내게 연락했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지었다.


- 연락해봐.

- 지금요?

- 아니, 이 미친놈아. 술 취해서 전화하지 말고 맨 정신에 연락하라고.

- 그치만 전 이미 까였고 군대도 아직 안 간 데다 그 누난 심지어 지금 취업까지 했는데요.

- 그 여자랑 되고 안되고 가 중요하지 않아. 지금 너한테는.

- 그럼요?

- 나중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거. (T: 네?) 내가 너보다 몇 살 더 살았다고 해서 나도 딱히 연애를 많이 해본건 아냐. 그렇지만 제일 후회되는 일들 대부분이 아무것도 못해보고 끝난 거였어. 너 지금 그 여자의 이별 소식에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중이라고 뭐 다를 거 같아? 결국 그 여자랑 아무것도 안 해봤기 때문에 계속 미련 가지게 될 거야. 차라리 지금 이 타이밍에 그 누나랑 어떻게 되든 한 번 제대로 만나봐. 그리고 막상 지금 다시 보면 네가 그녀에게 가졌을지 모를 환상이 깨질 수도 있잖아.


한참을 듣고 있던 T는 맥주를 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우리는 금세 캔 하나를 다 비웠고 자리에 누웠다. 불을 끄고 잠이 드려 하는데 녀석이 한 마디 내뱉었다.


- 형, 내일 연락해봐야겠어요.


#2010년 7월

- 형!


날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T였다. 녀석은 항상 오버하는 말투로 날 대했지만 그게 그렇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오히려 밝게 느껴져 좋았다. 그 날 이후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나는 술을 함께 걸치던 일행들로부터 적당히 둘러대고 몸을 빼내었다. 술잔을 들고 T의 앞에 앉았을 뿐인데 T가 말문 트인 아이처럼 말을 쏟아냈다.


- 형, 그 누나 만났었어요.

- '만났었다?' 별로였었어?

- 아뇨. 일 년 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예뻤어요.

- ㅋㅋㅋ. 그런데?

- 여전히 예뻤지만 다시 만나니까 생각이 달라지더라고요. 저희 둘 너무 생각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뭣보다도 예전 같이 느껴지지 않았어요. 형 말대로 이렇게 만난 게 정말 다행이었어요. 안 만났으면 진짜 계속 후회했을 거예요. 게다가...

- 응? 야 너 뭐 좋은 일 있구나?

- 네. 저 A랑 사귀어요. 

- 진짜? 와~~~ 축하해. 어떡하다?

- 그렇게 그 누나 세 번 만나고 아니다 싶어 지니까 A가 갑자기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다 형 덕분이에요.

- 네가 알아서 잘한 거지. 나는 그냥 주댕이 나불거린 거고. 축하해. 한 잔 하자.


술잔을 들이키고 내리는 T의 밝은 모습을 보며 괜히 나도 환하게 웃고 싶어 크게 웃었다.


#2018년 3월

어느 늦은 밤, 산책 도중 무료한 마음에 카톡을 열었다. 응? T가 웬일이지? 카톡방을 열었다.


'형 잘 지내죠? 혹시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괜찮으신가요ㅎ'


아무것도 듣지 않았지만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었다. 


'결혼 축하해. 음... 나 그날 저녁에는 약속 있어.'

'헉헉 ㅜㅠ'

'모임은 선약이 취소되거나 변경되면 갈게ㅎ 청첩장은 그냥 모바일로 줘. 너 결혼 준비하느라 바쁘잖아'

'그러면 결혼 끝나고라도 찾아뵐게요 ㅠㅋㅋㅋㅋ 혹시 근처에 계시면 잠깐이라도 뵈용ㅎ'

'그래ㅎ 너 좋을 대로 연락해~ 시간 내서 함 보자. A한테도 안부 잘 전해줘ㅎ'

'네 형 연락드릴게요!! 좋은 밤 되세요! ㅎㅎ'


스마트폰에서 빛이 사라지고 내 뒷주머니로 숨어들었다. 내 입가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웬일인지 허파 깊은 곳 어딘가가 아리는 듯 압박이 느껴지더니 긴 숨이 단 한 번에, 그리고 천천히 뿜어져 나왔다.



Introduction of Song
Sam Kim - It's you(feat. ZICO)

사실 처음엔 K팝 스타를 그렇게 눈여겨보지 않았다. 머랄까 청소년용 슈퍼스타K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저녁이 그렇게 한가하진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K팝 스타를 제대로 챙겨보기 시작한 건 권진아의 '시스루' 커버 클립을 본 이후였던 것 같다. 샘 김은 그때 본 지원자 중 하나였다.


샘킴의 목소리나 음악성이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 오히려 그의 첫 정규앨범을 들었을 때였다. 물론 K팝스타 시즌3 준우승할 때도 노래 참 잘한다란 생각은 들었다. 그렇지만 성공할 수 있을까? 본인의 노래로 대중에게 어필하는 건 유명 곡을 맛깔나게 커버하는 것보다는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지만 그의 앨범은 그런 나의 괜한 오지랖 같은 우려를 보기 좋게 깨버렸다. 


타이틀곡 'Sun and Moon'도 좋았고 크러쉬와 작업한 'Make Up'도 좋았지만 'It's you'가 그가 가진 재능을 가장 잘 드러내 줘서 제일 좋았다. 이후에도 권진아와의 듀엣곡 '여기까지', 리메이크 곡 'Think About' Chu', 프라이머리 음반에 참여해 불렀던 곡 '~42', 그리고 드라마 도깨비 OST 중 하나였던 'Who are you' 등 하나하나 발매될 때마다 내 음악 리스트에 업데이트되었다. 같은 시즌 우승했던 버나드 박이 JYP로 간 후 몇 곡 발매 못한 채 존재감이 미미한 것에 비해 유희열을 만나 자신의 음악을 하는 샘 김이 안테나로 입사한 것이 어쩌면 내게도 다행이었는지 모르겠다.


이번 에세이의 선곡 'It's you'도 지난 에세이의 선곡과 마찬가지로 내용 면에서는 정확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내 이야기도 아니다.) 2010년 3월의 T와 나 둘 사이에 있었던 상황은 상당히 비슷했는데 내 조언을 듣고 주저했던 만남을 했던 T는 결국 다른 여자를 선택하고 그녀와 꽤 오랜 연애를 거친 후 지난해 평생을 함께하기로 법적 맹세를 했다. T는 이후 나를 볼 때마다 꽤나 날 반겨주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 가는 길이 달라 이제는 잘 보지 못하지만 좋은 선택을 했던 T가 행복하길,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러길 바란다.


덧붙여 샘 김의 짧은 클립 하나를 추천한다.

Sam Kim - 'Officially Missing You' cover (원곡: Ta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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